우받세9기 綜合資料房/인생 교양자료 모음

박경리 선생에 관한 斷想

雲光 2012. 1. 30. 00:51

 

 

 

 

 

황순원, 서정주, 박경리 선생에 관한 斷想

 

  창문이 푸르스름해 지는 새벽의 여명보다는 하루 해가 지는 저녁 무렵을 나는 더 좋아한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이런 느낌이었다.

10代 때, 정동에 학교가 있었던 나는, 가끔 수업이 끝난 후에 버스를 타고 합정동까지 가고는 했는데 그것은 온전히 서쪽으로 지는 저녁 노을을 보기 위해서였다. 합정동 정거장에서 내려 기찻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한강이 바로 보였는데 그곳에서 서쪽으로 지는 저녁 노을을 망연히 바라보면서 아무 것도 아닌 일에 마음이 참 많이 아프기도 했었다.

그렇게 혼자서 아파하다가, 겁에 질려 총총히 집으로 돌아갔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소녀의 센치멘탈리즘에 픽 웃게 되고 참 오래 전 일이구나……..세월이라는 것이 새삼스럽다.

 그렇게 작은 일에도 마음이 아프고, 서럽기 조차 하고, 아직 때가 덜 탄 10대 때, 누구에게나 감성적으로 자리잡은 시인이나 소설가가 있었다면 내 나이와 엇비슷한 사람들에게는 아마도 서정주 선생, 황순원 선생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분들은 지난 2000, 황순원 선생이 9월에, 서정주 선생은 12월에 타계했다.

그 때의 그 착잡함이란! 세월의 무상함이란!

고등학교 2학년 교과서를 통해서 처음 접했던 시인이, 소나기라는 단편으로 처음 알게 되었던 황순원 선생이 세상을 떴다는 것은, 내가 느끼고 있었거나 아니면 나도 모르는 새, 세월이 훌쩍훌쩍 뛰어 갔다는 것은 뜻했고, 이제는 더는 누구를 싫어하거나, 더는 누구를 미워할 수 조차 없을 만큼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이기도 해서였을 것이다.

서정주 시인의 춘향유문은 얼마나 곱고 예쁘던지!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는 또 얼마나 내 가슴을 촉촉히 적셔 주었던지……

황순원 선생은 생전에 소나기를 대표작이라고 말하는 것을 싫어했다는데 그래도 소나기에서 그 빼어난 마지막 부분에 관한 문단의 뒷이야기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의 소나기 원고에서는 소년이 신음소리를 내며 돌아 눕는다는 끝 문장이 있었는데, 선생의 절친한 친구 원응서 선생이 그것은 蛇足이니 빼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나고 지난 5 5, TV에서 야구경기를 보고 있었는데 화면 아래로 지나가는 한 줄짜리 뉴스 속보는 박경리 선생 뇌졸중 등 지병으로 별세 였다.

 나는 박경리 선생의 작품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고, 선생의 작품을 많이 읽지도 않았지만, 선생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몇몇 이야기들이 생각나고 누구든 때가 되면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 전에 읽은 전혜린의 글에 묘사된 박경리 선생은 이랬다.

멋있는 여자는 박경리씨. 안 빗고 안 지진 머리가 여학생처럼 소탈했다

화가 천경자의 수필에는 박경리 선생과 덕수궁 산책을 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나는 여태껏 살아오면서 밥풀데기 하나 공짜가 없었어요 라면서 박경리 선생이 손가락으로 밥풀을 만들어 보이더라는 것이다.

 그런 박경리 선생을 나는 꼭 한 번 우연히 보았는데 작은 레스또랑 알리앙스 에서였다.

70년대 아담하고 정갈한 레스또랑 알리앙스는 명동 진고개에 있었다.

대학생이었던 나는 그 곳에서 친구와 점심을 먹거나 차를 마시고는 했는데 음식도 맛있었고, 진피스나 슬로진 같은 칵테일도 다른 곳 보다는 월등히 괜찮았다.

 봄이었는지 가을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날은 나 혼자였고 나는 진피스를 한 잔 마셨던 것같다.

때르르릉

레스또랑의 전화벨이 울렸는데 소박하고 정직하게 생겼던 웨이터가 나에게 다가와서 물었었다.

박경리씨세요?

나는 아닌데요 라고 말했고, 곧바로 내 옆 테이블에서

, 나에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때 그 말의 주인공이 박경리 선생이었고 전혜린의 글처럼 안 빗고 안 지진 머리는 아니었지만 아담하고 조용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 지난 세월을 되돌아 보니 그 때 알리앙스 에서의 박경리 선생은 시인 김지하를 사위로 맞기 전이었고, 지금의 내 나이보다도 젊었을 때 였다.

그랬었는데, 세월은 성큼성큼 가버렸고 주홍빛으로 선연하던 황혼도 잠깐이었다.

박경리 선생이 마지막으로 남긴 시 옛날의 그 집 마지막 행이 내내 내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출처: 인천 여성네트워크 5월호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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瑞村 | 조회 470 |추천 3 |2012.01.29. 06:21 http://cafe.daum.net/yooin32/6rkh/189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