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는 임진왜란 발발
420주년이 되는 임진년 입니다.
1592년 4월13일 일본의 15만8천 대군은
부산에 상륙한 후 파죽지세로 20일 만에 한양을 함락했고
임금 선조는 의주 국경까지 도망쳤습니다.
전 국토가 무참히 유린된 7년 전란은
참혹한 상흔을 우리 민족에게 각인시켰습니다.
30년 전 일본 오사카 성의 웅장한 규모에 압도되어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공격하기 위해
떠나는 일본 군대의 모습을 그린 ‘조선출병도’를
전시실에서 보고 전율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임진왜란은
우리들에게 반일(反日)의 원점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불멸의 이순신’ 같은
드라마로 임진왜란 당시의 시대상을 그리며
애국심을 고취해 왔습니다.
우리보다 고증에 더 철저한 일본 텔레비전들의
드라마에 등장하 는 임진왜란 당시를 보면
군사력 등 국력의 차이가 엄청납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 기 10년 전에 죽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는
수천 정의 조총을 가진 최신식 철포 부대를 갖고 있었고
그의 측실은 서양의 풍금을 치면서 유리잔 으로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조총은 1543년 포르투갈 인이 전해준 화승총을 개량한
것으로 사격개시거리가 약 109미터였다고 합니다.
당시 인구는 조선이 500만 명, 일본이 2,200만 명이었다고
어떤 일본 자료는 말합 니다.
군웅할거하던 다이묘(大名)들을 어떻게 통합해
패권을 장악할 것인가를 궁리 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다이묘들의
힘을 빼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는 주장도 있습니다.
일본 지도부는 1594년 4명의 소년을
교황으로 파견할 정도로
세상 물정에 밝았습니다.
명과 일본을 세상의 전부로 알고
공리공론에 탐닉하여 사화(士禍)나 일으키던
조선 의문약해빠진 사대부들과 딴판이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무능한 선조 밑에서
패가 갈린 조정은 동인과 서인의 악랄한 싸움을 벌였죠.
양비론이 아닙니다. 일본에 파견 했던 통신사의 보고는
정반대였죠.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다.
전쟁에 대비 하자”는 서인 측 주장에
“그런 정황이 없는데
왜 민심을 동요시키느냐?”고 전쟁준
비를 안 한 집권파 동인 패거리들을 보면
지난 선거에서 ’전쟁이냐, 평화냐‘며
평화가 아닌 염전(厭戰)심리를 부추겨
표를 구걸한 정당이 떠오릅니다.
‘당장 편한 게 좋지’라고 착각한 조정은
많은 일선 지방 관리들의 장계(狀啓)를 무시하고
전비를 게을리한 결과로 임진왜란이 터지자 이순신,
권율, 김시민, 신립, 송상헌, 정발 등
용감한 장군과 700의총으로 상징되는 많은
국민들이 의병으로 분전했음에도불구하고
전쟁의 자력 수행이 불가능하여 명의 원군을 받으며
7년간 싸워야했습니다.
1589년 대마도주였던 소 요시도시(宗義智)가
사절로 조선을 방문하여
임금에게 조총을 진상했지만 그 우수한 성능을 파악해
실전에 배치할 생각은 꿈도 꾸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 심지어 일본은 1587년 배 26척에 인원을 싣고
남해안에서 정탐활동까지 벌였습니다.
전쟁 발발 후 동인의 영수 유성룡 같은 중신이
서인이었던 율곡의 ’10만 양병론‘을 배척한 것을
통탄했다지만 부질없는 일이었죠.
임진왜란으로 민생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졌습니다.
왜군과 맞서 정규군으로, 의병으로 싸워야했고
수십만 명의 왜군과 명나라 군인들이 몇 년간
북새질치는 동안 그들을 먹이고 입혀야 했던
민중의 삶이 얼마나 처참했을 지는 상상이 안 갑니다.
왜군에게 능욕당해 아이를 잉태한 여승과 여인들을
거주하도록 했기 때문에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이태원(異胎院, 梨泰院)은 너무나 슬픈 무형의 전적지입니다.
수만 명에 이르는 조선 병사들의 코와 귀가
전리품으로 잘려 일본에 보내졌고 수많은
조선 인질들이 일본으로 끌려갔으며 일부는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유럽으로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역사는 300여년 뒤 냉정하게 반복되었습니다.
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제 병합했을 때,
초대 총독이었던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가토(加藤淸正), 고니시(小西行長)의 제장(諸將)이
이 세상에 살아 있다면 조선을 일본의 물건으로
삼은 이 밤의 달을 어떤 기분으로 볼 것인가”라고 읊었고,
통감부 외사국장이었던 고마쓰(小松綠)는
이에 답시를 지어 ‘타이코(太閤,
즉 도요토미 히데요시) 전하를 되살아나게 해
조선의 산들에 높게 나부끼는
일장기를 보여드리고 싶다’라며 기뻐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지도자들은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도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습니다. 요즘 미래를 향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반대를 전문으로 불나비처럼 정권 쟁취를 향해 뛰어드는
정치인들은 임진왜란에서
무슨 교훈을 얻었는지 궁금합니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은 망한다’는
금언이 있습니다. 눈을 크게 뜨고
세계를 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국가의 출발점은 안보입니다. 지금의 형세는
임진란 전의 당쟁을 방불합니다.
여당 소속이건 야당 소속이건 국가안보를 저해하는
정치세력은 국민들이 철저하게 퇴출시켜야 합니다.
바로 2012년 총대선 투표입니다.
그래야 자유민주주의가 훼손되는
더 큰 나라의 불행을 막고 21세기의 비전을
실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