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나의 연습방-03

6.25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雲光 2012. 12. 23. 22:48
6.25는 아직도 진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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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60여년 변함없는 전시체제를 유지하고 있지만, 한국은 돈으로 평화를 살 수 있다는 환상에 빠져 있다.
최성재   
올해로 6.25사변 62주년이다. 겨우 60여년 만에 6.25는 대한민국에서 거의 잊혔다. 학생들은 6.25 상식 설문에 찍찍 하품하며 생뚱 답변하고 눈치껏 얼른 수능연계 EBS 교재를 다시 펼쳐들고, 참전용사는 아무도 안 알아주는 훈장을 떼어 장롱 깊숙이 집어넣고 탑골공원의 공짜 점심 대열에서 비틀걸음으로 꾸불꾸불 열과 오을 맞춘다. 소련군 예비역 대위가 어느 날 일요일 새벽에 스스로 똥별 다섯 개를 이마에 갖다 붙이고 소련제 탱크와 소련제 기관단총(따발총)으로 탱크는 단 한 대도 없고 꿩 잡는 공기총 하나도 제대로 못 갖춘 국군을 상대로, 어린애 팔 비틀기로, 3천만의 귀에 쩌렁쩌렁 다 들리게 광소(狂笑)를 터뜨리며 단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더니, 3년 만에 ‘아, 어찌 잊으랴!’ 300만의 생목숨을 앗아갔다. 그런 6.25사변이, 제2차세계대전의 엿 먹이기식 끝내기이자 제3차세계대전의 도발적 응수타진이 대한민국에서 거의 잊혔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6.25의 폐허에서 불사조처럼 일어나 세계 7번째로 20-50(1인당 국민소득 2만 불에 인구 5천만) 클럽에 가입한 선진 강대국이, 어쩌다 역사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는 경제 강대국 안보 약소국이 되었을까.
 
  1993년 3월 19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죽어도 난 공산당’ 장기수 이인모를 아무런 조건 없이 북한에 돌려보내면서, 대한민국에서 6.25는 불편한 진실이 되기 시작했다. 의도적으로 정부가 앞장서고 대중매체가 앞뒤로 평화와 화해의 쌍 나팔을 불면서 남침 전쟁에 대한 국민 기억의 창고에 겹겹이 철조망을 둘러치기 시작했다. 그 일주일 전인 1993년 3월 12일, 김정일(김일성은 이미 실권 없는 상왕으로 쫓겨난 상태)은 NPT 탈퇴를 선언했다. 핵무기 개발로, 비대칭 전력으로 한국의 전쟁 의지 자체를 꺾어 버리고, 기어코 ‘남조선을 해방’시키고 말겠다는 선언이었다. 6.25를 절대 잊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낙동강에서 ‘미제국주의자’ 때문에 돌아선 천추의 한을 적화통일의 축제로 대미를 장식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런데 보라, 김영삼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며, 1993년 3월 10일에 결정한 인도적 결정을 번복할 수 없다며, 예정대로 판문점을 통해 이인모를 ‘공화국의 영웅’으로 금의환향시켰다.
 
  그 후 김정일은 김영삼을 사로잡아 벼랑 끝에 세우고 클린턴과 인질 협상을 벌이기 시작했다. 속셈이 너무도 뻔한지라 클린턴은 초특급 스나이퍼(저격수)를 배치했으니까, 김영삼에게 조금만 참으라고 전음입성으로 몰래 귀띔했다. 그러자 김영삼은 화를 벌컥 내며 민족이 이념에 앞선다며 펄쩍 뛰었다. 돈은 얼마든지 낼 테니까, 자기 걱정은 말고 김정일을 잘 모시라고 신신당부했다.
 
  방송과 신문과 대학의 붉은 글씨가 김정일을 적극 변명해 주었다.
  “장군님(한국은 상대도 안 해 주고 유일초대강국 미국과 싸우는)의 말씀이 맞으시다. 영변약산의 핵시설은 진달래의 적이 아니라 진달래의 친구다. 한국은 핵발전소가 되는데, 왜 북한은 안 되느냐?”
  “전두환을 도와 광주 민주화를 짓밟은 미국은 사죄하라! 물러가라!”
  “잊지 말자! 아니, 절대 잊을 수 없다. 5.18! 아, 5.18! 전두환은 살인마! 미국은 살인마의 직속상관!”
 
  핵무기는커녕 공포 한 방 못 쏘고 스스로 무너진 핵초강대국 러시아에 들러서, 김영삼이 옐친으로부터 선물을 받아왔다. 6.25는 대한민국 사람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김일성이 앞장서고 스탈린과 모택동이 보증한 전쟁임이 태양 아래 온전히 드러났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잠깐 노인세대의 관심이나 끈 흘러간 유행가의 리바이벌에 지나지 않았다.
 
  김영삼은 상상초월 비자금을 몰래 아들에게 맡겨 놓고는, 시침 뚝 떼고 자신은 1원 한 장 안 받았다고 성경에 손을 얹고 삐죽 입으로 맹세하며, ‘비자금 빼돌렸다며’ 기어코 전두환과 노태우를 감옥에 처넣었다. 총 한 자루 안 들었던 중국의 천안문 민주화 운동과는 달리 시민과 학생들이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총과 탱크로 중무장한 광주사태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는 성역(聖域)으로 올라섰다. 누구도 거기에 토를 달지 못했다. 오로지 비분강개하거나 죄의식을 가져야 했다. 부채의식을 가져야 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기 전에 이미 200여 명이 죽은 광주사태는 300만이 죽은 6.25사변보다 비중이 200대 1로 높아졌다. 마침내 김대중 정부는 독재의 독재인 김정일이, 스탈린과 히틀러도 지금쯤 지옥에서 ‘큰형님으로 모실’ 김정일이 황금마차에 태워 내려 보낸 자들과 나란히 광주사태를 기념하기에 이르렀다. 세상에! 단 한 명 거기서 6.25를 상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6.25사변은 삼국통일 훨씬 이전 삼국끼리 해마다 벌이던 성(城) 따먹기 이야기처럼 잊혀 갔다. 아니면, 머나먼 나라의 머나먼 옛날이야기로 전락했다.
 
  여중생 교통사고, 노근리 사건, 광우병, 천안함 음모설, 한미행정협정, 평택 미군 이전, 제주 강정마을 등으로 5.18의 스탈린으로 낙인찍힌 미국은 끊임없이 공격을 받았다. 더럽고 아니꼽고 치사해서 그래, 정 그렇다면 물러갈게, 라는 말이 나오도록 만들었다. 마음만 먹으면 100만 동원은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6.25의 두 실세 중국과 러시아에 대해서는 과거를 절대 묻지 않고 현재도 절대 시비 걸지 않는다. 한편 KAL기 폭파, 동해안 잠수정 침투, 연평해전,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핵실험, 미사일 발사, 땅굴 등 공산왕조가 대를 이어 진행 중인 6.25는 민족화해의 입장에서(김씨공산왕조 입장에서) 해명되거나 축소되거나 역공되거나 무시되는 등으로 국민의 기억 장치를 계속 방해했다. 색깔론, 민주화보상법, 친일파 사전 등으로 꿩 먹고 알 막는 전술을 구사했다. 공격과 수비를 동시에 현란하게 구사했다.
 
  북한의 60여년 6.25 전시체제를 증언하는 탈북자는 개밥의 도토리로 만들고, 북한인권은 김대중의 노벨평화상 수상 정신에 위배되는, 6.15선언에 위배되는, ‘황제’ 김정일/김정은의 역린을 건드리는 내정간섭으로 폄하되었다. 북한 주민의 인권은, 300만 개죽음과 2000만 영양실조는 된장 속 구더기처럼 주인의 처분에 맡기는 것으로 철저히 무시되었다. 공포 언론에 오죽 오금이 저렸으면, 친북좌파는 헛기침만 해도 수백억 원씩 동네방네 소문내며 갖다 바치는 대기업이 북한인권에는 단돈 100만 원도 아니 낼까. 북한 주민 300만 굶어 죽음이 한국의 두 여중생 교통 사고사에 비하면, 평양의 명예 학생이 된 여중생의 죽음에 비하면,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일로 철저히 무시되었다. 알 수 없다는 이유로! (김정일을 배신한) 탈북자의 말은 절대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북한은 3대를 이어 전시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하나에서 열까지 전쟁 논리로 적화통일을 고취시켜 왔다. 변한 건 조금도 없다. 북한 주민이 조금이라도 잊을 만하면 도발을 감행하여 한국과 미국에 책임을 뒤집어 씌워 전쟁의 공포를 확산시켰다. 노래도 소설도 연극도 영화도 교과서도 모조리 전쟁 논리로 가득 차 있다. 수학 교과서의 사칙 연산도 미군과 괴뢰군 죽이는 것으로 가르친다. 심지어 영어도 그렇게 가르친다. 아나운서도 10분만 전시 방송을 하고 나면 옥수수 배가 푹 꺼진다. 60여년이 한결 같다. 먹고 사는 경제는 언제나 뒷전이다. 상위 1%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다. 아니, 소련군 대위 집안만 호위호식하면 된다.
 
  한국은 싸우면서 건설하여 6.25의 폐허에서 2차 대전 후 후진국에서는 유일하게 원조 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의 대열에 올라섰다. 이게 요상하게 변질되기 시작했다. 대체로 김영삼 정부부터 ‘싸움’은 북한 공산독재체제가 아닌 대한민국의 근대화(산업화와 민주화를 포함한 개념) 세력으로, 자칭 민주화 세력의 정적(政敵)으로 대상이 바뀌었다. 그것도 치졸하게 관을 열어 시체에 매타작하는 복수혈전이었다. ‘건설’도 ‘역사 파괴’와 ‘대기업 때리기’ 토대 위에 세우는 ‘역사 왜곡’과 ‘노조 기사 서임(騎士敍任)’으로 바뀌었다. 결국 기고만장하던 김영삼은 외환위기 자초(自招)로 친북좌파 세력에게 온갖 멸시를 다 받으면서도, 제발 자기에게는 푸른 옷을 입히지 말아 달라며, 그들에게 푸른 집의 대문을 공손히 열어 주었다. 그 후는 일방적으로 김정일의 마음 먹기였다.
 
  한국의 외화로 김정일은 핵무기를 개발하고 대륙간탄도미사일도 개발했다. 대북정보라인은 와해시키고 대남정보라인은 김영삼 선친의 멸치잡이 그물보다 촘촘하게 구축했다. 300만을 굶겨 죽이며! 마침내 한국은 6.25를 까맣게 잊었다. 전쟁의지가 완전히 꺾였다. 저들의 마초 전쟁논리에 한결같이 굴욕적인 평화논리로 사지를 배배꼬며 아첨한다. 칭기즈칸의 후예가 총 인구 100만 명으로 전 세계 부의 20% 차지하던 중국을 100년간 지배하고, 누르하치의 후예가 총 인구 30만 명으로 역시 전 세계 부의 20% 차지하던 중국을 260년간 지배했다. 몽골과 후금은 단 한 번도 전쟁의지를 숨기지도 않았고 버리지 않았지만, 중원의 송나라와 명나라는 뒤룩뒤룩 살찐 몸으로 어즈버 평화를 노래하며 전쟁에 대비하자는 꼬장꼬장 충신들을 시대를 읽지 못하고 냉전의식에 사로잡혀 있다며 노발대발하며 잔인하게 죽여 버렸다.
  (2012.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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