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1일 탑골공원의 전율했던 순간 - 독립선언서 낭독은 누가 하였을까?
탑골(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키로 한 민족대표들은 거사 전날인 2월 28일 오후 5시 서울 가회동 손병희의 집에서 23인이 참석한 가운데 마지막 모임을 가졌다.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하면 무력충돌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어 손병희가 명월관(明月館) 인사동 지점인 태화관(泰和館)으로 장소를 변경했다.
이에따라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들은 낮 12시쯤부터 태화관에 모여들었고, 탑골공원에도 수천 명의 시민·학생들이 모여들었다. 파고다공원에 모인 학생들은 시간이 되어도 민족대표들이 나타나지 앉자 강기덕· 김문진· 한국태 세 사람이 태화관으로 가서 민족대표들에게 파고다공원으로 가자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최린은 '신문조서'에서 ‘손병희가 이런 일은 젊은이들이 잘 이해되지 않는 일이니 선진자 들에게 맡기고 돌아가라고 했고, 다른 사람들도 빨리 돌아가라고 해서 학생들은 돌아갔다’고 전하고 있다.
거사에 사용될 선언서의 원고는 오세창(吳世昌)에 의해 천도교(天道敎)에서 경영하는 보성인쇄소 사장 이종일(李鍾一)에게 넘겨져 거사 이틀 전 2월 27일 오후 6시경부터 10시까지 2만 1000장을 인쇄하였다. 인쇄된 선언서는 경운동(慶雲洞)에 있는 천도교당으로 옮겨지고 28일 아침부터 전국의 배포 담당자에게 전달되어, 3월 1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주요도시에서 일제히 선포되었다. 그중 서울에는 4000장이 뿌려지게 된다. 명월관(明月館) 인사동 지점인 태화관(泰和館)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당일 궁중요리 음식점인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서 서명자들은 선언서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정각 오후 2시를 기다렸다. 만해 한용운이 일어나 연설을 했고, 그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가 울려퍼졌다. 민족대표들은 선언을 끝마치자 축배를 들고 스스로 일본 관헌에게 자기들의 행동을 알려주어 체포되었다.
한편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했던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으로 장소를 변경함에따라서 탑골공원에서는 혼선이 생겼다. 독립선언서 낭독자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아침부터 탑골공원에는 4,000 ~ 5,000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낮 열두 시를 알리는 오포(午砲)가 울리고 나서 이 때 학생 대표 한 명이 팔각정에 올라 선언서 낭독을 하였다.
“선언서,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1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꿈속같이 고요한 장내에는 흥분에 사로잡힌 흐느낌만이 점차로 높아갔다. 읽는 이의 음성도 때로는 말귀가 명백히 들리지 못하였다. 낭독을 마치자 ‘대한독립만세!’가 우뢰같이 터져 나왔다. 선명하게 인쇄한 독립선언서와 수기(手旗)는 각처에서 쏟아져 나왔다. 학생들의 검은 모자는 잘 받은 풋보올처럼 공중으로 올라갔다. 미친 듯 취한 듯 장내의 군중은 어쩔 줄을 몰랐다. 그리고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의암 손병희의 지시에 의해 최남선이 원고를 쓰고 보성사 에서 25,000부를 인쇄 전국에 배포한 기미독립선언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탑골공원 팔각정 서울 종로의 만세시위. 일제의 무력 진압에 몸을 피하는 모습
이날의 탑골공원 분위기는 이루 형언 할 수 없도록 가슴 벅차올랐음을 다음의 글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으로서 탑골공원에 있었던 이의경(李儀景: 필명 이미륵)은 '압록강은 흐른다'에서 ‘갑자기 깊은 정적이 왔고 누군가가 조용한 가운데 연단에서 독립선언서를 읽었다. 잠깐 동안 침묵이 계속되더니 다음에는 그칠 줄 모르는 만세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좁은 공원에서 모두 전율했고, 마치 폭발하려는 것처럼 공중에는 각양각색의 삐라가 휘날렸고 전 군중은 공원에서 나와 시가행진을 했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일제는 시위행진 때 연행자들로부터 독립선언서 낭독자를 조사를 하였으나 학생들은 “육각당(六角堂) 위에서 중절모자를 쓴 자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지만 누군지는 모른다”고 대답함에 따라 일제는 끝내 낭독자를 체포하지 못했다. 팔각정에 모인 학생들앞에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모자를 쓴 초로의 신사 <삼일운동 기념 동판부조>는 10개의 부조를 조각가 김경승이 1967년에 청동 주물 후 화학적 파티네이션 처리를 한 청동부조작품이다.
1967년 삼일운동 기념 동판부조를 만들 때 시위 연행자들의 심문조사 과정에서 밝힌 모자를 쓴 초로의 신사가 학생들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모습을 묘사하여 만들었다. 일제가 못 밝혔듯 모자를 쓴 초로의 신사는 아직도 누군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면 과연 어떤 사람이 탑골공원 팔각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을까? 심문조서 과정에서 나온 기념부조의 모자 쓴 초로의 신사, 당일 집회에 참석한 학생대표, 그리고 정재용이 거론되고 있다. 현재로는 이 대목에서 정재용이 나섰다는 것이 가장 유력하게 전해온다. 즉 해주 출신 정재용(鄭在鎔, 1881~1976.사진)장로로 서울 연지동에 있는 경신학당(儆新學堂)을 졸업 후 감리교 계통학교인 해주 의창학교(懿昌學校) 교감으로 재임 중 서울 중앙감리교회 김창준 목사로부터 급한 연락을 받고 상경, 인쇄물을 받아 원산 감리교회 정춘수 목사에게 철도편으로 부칠 때 한 장 뽑아 그길로 탑골공원으로 갔다고 한다. 그리고 민족대표가 나타나지 앉자 정재용이 공원 내의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불렀다고 훗날 자신이 밝힌바 있다.
1919년 3월1일 독립선언서는 민족대표에 의해 민중 앞에서 낭독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종교계와 학생들을 통한 삼일독립선언서의 전국적인 배포와 전달은 치밀한 운동의 조직과 준비를 함께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각지의 3·1운동의 전개에 있어 커다란 역할을 했다. 삼일절 노래 작사 정인보 작곡 박태현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같은 대한 독립 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물 다시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하 이나라를 보서서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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