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나의 연습방-03

♣ 대한민국의 기적 (우리 후손들에게 꼭 알립시다) ♣

雲光 2011. 12. 28. 23:14

♣ 대한민국의 기적 (우리 후손들에게 꼭 알립시다) ♣



♣ 대한민국의 기적 (우리 후손들에게 꼭 알립시다)은 이렇게 이루어 졌다 ♣


1955년10월8일 UNKRA(UN한국재건위원회) 인도대표 "메논(Menon)"은 한국을 돕기 위해 UN에서 파견된 특별조사단의 단장으로

1주일 동안의 방문 후 복서에, "쓰레기 통에서 과연 장미꽃이 피는가" 한국 땅에서 경제개발을 기대한다는 것은 마치 "쓰레기 통에서 과연 장미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결론 지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를 시찰하고 돌아간 영국 '롱던 타임즈' 사이먼즈 기자도 똑같은 말을 신문에 헤드로 썼다. 이 말은 우리들에게는 견디기어려운 실망을 주었었다.

 

[시내 9개 병원은 자기 피를 팔아 돈을 마련하는 가난한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뎃빵족'이라는  새벽부터 줄을 서있다가 자리를 파는 족속이 생겨났다, 피값에서 5백에서 1천원을 자리값으로 뜯어내내고 자리를 팔았고, 자신들의 피를 파는 "앗사리족"으로 변하기도 했다. 바로 이들이 "흡혈귀족"들이다.(1961. 3.12일자 사회면 '현대판흡혈귀'신문기사)

 

1961년 3월8일 현재; 전남 도청이 공식집계한 도내 절량 농가는 16만4천42호로 총 94만6천명이 대책없이 굶고 있었다. "보릿고개" 였다. 각면사무소에는 절량 농민이 줄을 잇고, 이들은 부창증때문에 걸음도 제대로 옮기지 못하고 있다. 이런 햔상들은 날로 늘어만 가고 있었다.

 

1960년 4월19일 학생혁명으로 이승만정권을 붕괴시키는 역사적 계기를 만들었다.

1960년말 당시 경제사정을 보면, 1인당 GNP(개인당 국민소득) 단돈 $87 였고, 우리나라 외화보유고는 2,300만$에 불과했다.

무역 규모는 대만이나 필리핀에도 훨씬 모미치는  3,300만$를 수출하고, 3억4천4백만$를 수입했으나 그 대금의 지급은  거의가 공공원조로 이루어졌다. 2어4천2백만$가 원조 자금이었다. 원조자금으로 나라 살림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1963년까지 개인무역위주의 여명기에 불과했고, 수출 1악달러를 돌파한 1964년부터 수출다운 수출이 시작 되었다.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불어 넣어 주었다.

1억달러는 전세계  국가 중 84위에 불과한 것이였지만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우리 나라로서는 대단한 일이였었다.

석유 비료,철강 등 원자재는 물론, 쌀, 보리등 생활필수품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해야만 했던 시대에 미국의 원조가 줄어들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연평균 43.8%의 수출 증가율을 기록했고, 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이 끝난 1971년 우리의 수출은 10억$로 급선장 했다.

1970년대는 높고 험한 격랑 속에서 본격적인 시련과 도전을 통해 자립경제와 고도 성장을 실현한 시기라 할 수 있다.

국내외적으로 수 많은 정치. 경제적 시련을 겪으면서도 연평균 경제 성장률 12.7%의 비약적 성장을 이루었다.

 

1977년 11월30일 제 13회 수출의 날 행사가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였다. 오전 10시 정거, 박정희 대통령의 입장과 더불어 기념식이 시작 되었다.

"국민 여러분, 오늘은 우리민족의 역사적 영원히 기록될 날이 될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못사는 민족이라고 했습니까." 박대통령의 떨리는 목소리가 외쳐지자 식장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는 어느새 흘러내리는 눈물로 앞을 가리게 되었다.

1977년은 우리에게 이지못할 특별한 해였다. 수출 100억달러, 그리고 국민소득이 1인당 1천$가 달성 되던 해해 였기 때문이다. 그당시 100억$ 수출목표 달성이란 아무도 믿거나 기대하지 않았던 기적 바로 그것이였기 때문이다.

 

1995년 우리나라의 1인당 GNP는 1만$로 늘어나 세계 26위를 기록하게 되었고, 수출액은 세계 12위에 달했다.

우리민족은 교육받은 지적 자원밖에는 자연자원이 거의 없다. 좁은 국토에다 분단된 국가이다. 밀도 높은 인구, 청산되지 않은 일제의 잔재, 한국 동족상재으로 인한 폐허, GNP $80. 배곺음, 허무, 폐허, 그 속에서 우리는 [잘 살아보세!]라는 공감대를 가지고 오늘의 기적을 이루어낸 것이다. 정말 대단한 민족이 아닌가?

UNKRA 대표 "메논"이 살아 있다면 그는 과연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묻고 싶다.

 

▶ [학사 광부와 간호사]:

    "5.16 군사구데타"로 정권을 인수한 군사구데타로 인해 미국을 위시한 우방들의 지원이 완전 차단된 5.16 군사정권은 재정난에 당면하게 되었고 주변국가들의 비협조로 재정난에 당면하게 되었다. 1차-7차까지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담당 수립한 백영훈 박사(아시아의 프로이센)를 앞세워 서독과 3000만$ 차관교섭을 하게 되었으나 제3국 은행의 보증을 받을 수 없게되자 백박사의 주임교수인 "에르하르트" 수상의 배려로1962년에  5,000명의 학사광부, 2,000명의 학사 간호사의 월급을 담보로 하여 $3,000만(1억5천만 마르크)를 성사시킨 후에 서독의 "뤼비케 대통령"과 "에르하르트"수상의 초청으로 1964년 12월6일 독일정부에서 보내준 "루프트한자" 649호기펴으로 쾰론 본 공항에 대통령과 수상의 영접을 받으며 도착했다. 

 

 

우리 학사 광부들과 학사 간호사들은 성실하고 열심히 일했다. 그들은 모든 서독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았고 성실근면 친절성에 매일 같이 신문에 대서특필하여 소개 되었다. 그로부터 2년이지난 1964년에 우리나라 대통령이 국빈방문하게된 것이다.

 

광부 5천명모집에 약 4만명이 응시해서 8:1의 경쟁률을 넘었고, 간호사도 2000명모집에 2만명이 몰려들었다.

보수는 400마릌($100)에서 700마르크($175)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이 시간외 근무를 자원하였고, 몸을 아끼지 않고 성실하게 열심히 일을 하였다. 1,000미터가 넘는 지하 탄광 막장에서 석탄에 묻혀 검은 흑투성이가 되어 열심히 일하는 그들이 아니였다면 우리는 서독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백영훈 박사와 "에르하르트" 수상의 믿물교섭이 있었기에 이루어진 일이지만, 그래서 우리는 어려운 재정난을 이겨낼 수가 있었다.

 

"뤼브케"대통령의 배려로 '루르지방 탄광'지대의 공회당에 도착 500여명의 광부들이 박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흙투성이가된 작업복차림의 우리 학사 광부들은 박대통령이 단상에 오르자 애국가가 울렸다. 대한사람 대한으로....하는 대목에 이르자 모두는 어느새 목멘 소리로 변했다 광부들은 제나라 대통령을 보자 왈칵 복바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서러움에 그만 터져나오는 그간 얼마나 고통 스러웠겠는가? 박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내나라 젊은이들이 고생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에 대통령의 가슴은 메어질듯 했고 온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박대통령은, "광원 여러분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합시다,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 만이라도 닦아 놓읍시다.

그러나 연설은 제대로 이어짖 못했다. 마침내 여기저기서 흐느낌으로, 마침내 박대통령 자신도 울움을 터트리고 말았다.

곁에 있던 육영수 여사도, 
뤼브케"대통령도 그리고 수행원도 모두 울었다. 어떤 확실한 공감대가 이 가슴에서 저 가슴으로 전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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