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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관응(觀應) 스님

雲光 2009. 11. 27. 00:49

관   응 (觀應) 스님 (1910-2004)

 

 1910년 6월 15일생. 경북 상주 生
·1929년 광주 남장사서 혜봉스님 계사로 사미계 수지
·1936년 선학원 일붕스님 계사로 비구계 수지
·1938년 동국대 졸업
·1940년 일본 용곡대 졸업
·1959년 조계사 주지
·1961년 동국학원 이사
·1972년 안양교원 이사장
·
2004년, 불기2548년 2월 28일 오후 7시에 황악산(黃岳山)

             직지사(直指寺)  중암(中庵)에서 입적했다.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시다

상주 남장사에서 혜봉(慧峰)스님을 은사로 하여 득도 수계. 구족계를 받음

무문관에서 6년결사를 마쳤음.

직지사 조실 조계종 원로회 원로의원


저서 <화엄경>


약력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관응 스님은 19세 때 상주 남장사에서 탄옹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어 금강산 유점사 강원을 졸업하고 1936년 서울 선학원에서 비구계를 받고 정식으로 승려가 됐다.


이후 관응 스님은 학승(學僧)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서울 중앙불교전문학교(동국대 전신)를 졸업하고 경북 문경 김용사에서 강사(講師)로 일하던 중 해인사의 해외 장학생으로 선발돼 일본으로 건너가, 불교계의 명문인 교토 용곡(龍谷) 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귀국해서 직지사를 중심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가 길러낸 강백(講伯)으로는 조계종 교육원장을 역임한 원산 스님, 통도사 박물관장 범하스님, 실상사 화엄학림 학장 연관 스님 등이 있다.


관응 스님은 또 참선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오대산 월정사에서 안거(安居)에 참여한 것을 해인사 백련암, 고성 옥천사, 수도암 등에서 참선에 몰두했다.

특히 50대 후반의 나이인 1965년부터 6년간 서울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無門關)에서 6년 동안 외부 출입을 끊고 참선에만 몰두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는 1959년부터 비구·대처의 분규 와중에서 조계사 주지를 맡으면서 불교계의 현실에 염증을 느끼고 선택한 길이었다.


관응 스님은 이밖에도 조계사·용주사·직지사 주지, 동국대 이사, 조계종 원로회의 부의장 등으로 종단 행정에도 참여했다. 특히 조계종 청소년 교화연합회 총재, 학교법인 안양학원·보문학원 이사장 등으로 청소년 교화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그는 지난 1994년 불교계의 최고 명예인 조계종 명예원로에 추대됐다.


관응 스님은 임종게(臨終偈)를 남기지 않았다. 이는 평소 문자에 얽매이지 말라고 강조했던 자신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한 것이라고 제자들은 설명했다.

그는 법문에서 “마음의 눈을 뜨면 모두가 부처”라며 “자신 속의 부처와 하나가 되어 부처의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보라”고 가르쳤다.


1982. 9. 28. 법회시 설법하였음


참 생 명

 

부처님의 법은 사실 제대로 설(設)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제대로 알아듣기도 어려운 겁니다. 왜냐 하니 부처님 법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우리 범부(凡夫)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부처님의 깨달은 내용을 알리게 하든지 자신의 수행에 의해 체득한 것을 전달해야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불법이란 대체로 이렇게 되어 있어요.

  「실지(實地)는 불수일진(不受一塵)이지만 불사문중(佛事門中)에는 불사일진(不捨一塵)」이라 하여 법을 제대로 설하면 모든 것이 다 법이 될 수 있지만 법을 제대로 설하지 못하면 아무리 해도 그것이 부처님의 법을 들먹이는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 우주공간에는 사람이라는 생명체를 비롯하여 많은 생명체가 살고 있습니다. 금강경(金剛經)에 보면 이런 생명의 종류는 우리들 인간처럼 육신을 지닌 생명을 유색(有色), 육신이 없는 생명, 즉 귀신이나 다른 취(趣)와 같은 것을 무색(無色), 그리고 감각과 생각의 유무(有無)에 따라 유상(有想)과 무상(無想), 그리고 이러한 것들의 중간 것으로 비유색(非有色)과 비무색(非無色), 비유상(非有想)과 비무상(非無想)으로 구분하고 있으며 다시 이 세상에 나오는 상태로 보아서 인간처럼 태(胎)로 낳는 태생(胎生), 알로 낳는 난생(卵生),습기에 의해 낳는 습생(濕生), 그리고 천당이나 지옥에서처럼, TV를 켜면 화면이 나오듯, 이 몸 그대로 가서 태어나는 화생(化生)으로 구분합니다.

 

그러나 이 많은 것들 중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유색과 무색 그리고 그 중간 정도뿐입니다. 그런데 요즘 생물학자들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 땅위에 사는 생명체의 종류가 600만 가지나 된답니다. 이 많은 것들에 일일이 이름을 붙일 수 없어서 인간을 뺀 나머지 것들을 중생(衆生)이라고 하는 겁니다.

 

생명을 지닌 이 많은 중생들은 불행하게도 살아가는 가운데 고(苦)를 떠나 있을 수가 없어요. 우리 인간만 해도 나는 게 첫째 고생이요, 늙어가는 것이 또 괴롭습니다. 병이 들면 또 얼마나 괴롭습니까? 늙고 병들면 결국 죽게 됩니다. 이것 또한 고통입니다.

 

살아가는 가운데 눈, 귀, 코, 혀, 몸의 감각작용을 통해 싫은 것을 받아 들여야 하는 것, 이게 또 고통입니다. 구해도 구해지지 않는 것이 고통이며 사랑스러운 사람들끼리는 한데 모여 살고 싶은 데 자꾸 떠나가게 됩니다. 살아서도 헤어져 있게 되고 죽어서 영원히 떠나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또 고통입니다. 또 보기 싫은 사람을 자꾸 보게 되는 것, 이것이 또 귀찮고 괴로운 일입니다. 오온(五蘊)으로 되어있는 우리의 육신 또한 고통덩어리입니다.

 

그래서 불교를 믿든 예수를 믿든 종교를 믿는 것이나 학문을 하고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하는 등의 일체의 행위는 이러한 고(苦)를 떼어내고 낙(樂)을 얻자는, 이를테면 이고득락(離苦得樂)을 그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통을 떼어내고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것은 인간 뿐 아니라 생명을 지닌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제아무리 돈을 벌고, 명예를 얻고, 높은 지위에 올라도 이고득락(離苦得樂)은 되질 않습니다. 우리들 보통 사람들은 밖으로부터 행(行)하여 구한 것으로 자신의 속에서 나오는 고통의 구멍을 메우려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보통 이고득락하려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해봐도 이고득락이 잘 되질 않습니다.

 

그래 생각해 보니 이 욕구란 것이 속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치 땅에서 샘물 나오듯 속에서 온갖 욕구가 나오니 우리들의 이 육신이란 것이 참 생명이 아닌가, 이렇게 알아 버립니다. 우리는 보통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부처님 이전의 인도에서도 98가지나 되는 학파의 많은 철학자들이 모두 이 육신이 생명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것을 지온아(持蘊我)라고 하는데 오온(五蘊)을 지켜서 내 생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온아(離蘊我), 즉 육신이 있기 전에도 생명이 있었고 육신을 가지고도 생명은 있고 또 육신이 무너진 뒤에도 생명이 있다는 이 생각을 다른 말로 상견(常見)이라 하고 육신이 무너지면 우리 생명도 없어져 버린다는 생각을 단견(斷見)이라 합니다.

  

부처님 이전의 많은 외도(外道)들은 이런 단견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깨치고 보니 이건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많은 법주에 가장 먼저 팔정도(八正道)를 설하였습니다.

 

그 첫 번째가 정견(正見)입니다. 바른 소견이라는 뜻이지요. 바른 소견을 지님으로써 바른 인생관과 바른 우주관이 서게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바른 인생관과 우주관이 없이는 절대로 바른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흔히 불법승(佛法僧)의 삼보(三寶)를 주장합니다. 법을 깨친 이를 부처님(佛)이라 하고 법을 깨치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들, 즉 사부대중(四部大衆)을 승가야, 즉 승(僧)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법(法)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우주 전체의 생명체를 법이라 합니다. 우주에는 무언지 몰라도 있는 것이 있어서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 몸뚱이는 어머니 뱃속에서 겨우 열 달 만에 모든 신체의 부분과 기능이 완성됩니다. 그러나 우리 부모님도 어떻게 해서 우리 몸뚱이가 그렇게 되어 나왔는지 모릅니다. 이건 아무도 모릅니다.

 

인생(人生)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른단 말입니다. 우리 몸에 맥이 뛰고 피가 돌지만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가 입으로 여러 가지 음식을 먹으면 우리 신체기관을 소화 작용을 거쳐 피(血)로 동화시키는데, 색깔도 다른고. 질(質)도 서로 다른 여러 종류의 음식물이 빨간 피로 동화(同化)된다니 참으로 모를 일입니다. 또 땅에 씨를 뿌리면 씨앗은 밑으로 뿌리를 내리고 땅밖으로 줄기와 잎을 내밀어, 가령 그 씨가 고추씨라면 땅속의 뿌리는 고추에 적당한 기운을 빨아들이고 줄기와 잎도 고추를 맺기에 적당한 기운을 빨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나 초목(草木)이나 외부의 기운을 자신에게 동화시키려는 것은 같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되는 것인지 참으로 알 수 없고 이상할 뿐입니다. 유가(儒家)에서는, 주역(周易)을 보면, 하늘과 땅의 큰 작용이 만물(萬物)을 낸다고 했으며 예수교에서도 만물을 내는 당체를 하느님이라고 합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이것을 일러 우주법칙, 즉 우주의 만물을 내는 원동력, 다시 말해 기운(氣運)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기운이 하나라는 겁니다. 사람을 비롯한 천지만물의 속에 들어가서 그것들이 살 수 있도록 하는 이 하나의 기운을 불교에서는 법(法)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 하나가 우리 인간을, 그리고 우주만물을 만들고 또 숨을 쉬며 살게 합니다.

 

이렇게 우주에 가득 차서 만물을 내고 살리는 이 힘은 어떤 방법으로 표현할 수 없고 그저 부사의(不思議)할 뿐입니다. 나중에는 아무래도 표현이 안 되니까 이치(理致)라고 했어요. 이치(理致)가 무엇인고. 하니 부지이연(不知而然)이라. 까닭은 몰라도 그대로 되어 나가는 것이 우주법칙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기운이 나한테 들어와서 내가 살고 초목(草木)에 들어가면 초목이 살고 짐승에게 들어가면 짐승이 살고 또 되어 나오는 것이 알로도 되어 나오고 태로도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생명이 내 몸뚱이 속에 꼭 하나가 따로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인 그 기운이 밤나무에 들어갈 때에는 밤나무만큼 쪼개져서 밤나무 속에 들어가 밤나무를 차지하는 줄 압니다. 소나무에는 소나무, 사람에게는 사람, 모두 그런 식으로 되는 줄 아는데 사실은 하나입니다. 하나이면서 만물(萬物)을 살리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들 자신의 몸속에는 생명이 각각 하나씩 들어 앉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깨닫지 못한, 잘못된 망상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뒤에 보니 하나이면서 만물을 내더라, 일즉일체 다즉일(一卽一切 多卽一)이라, 하나가 곧 일체고 일체가 곧 하나더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한테 배운 것도 아닌데 내 몸뚱이 속에는 내가 하나씩 따로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한단 말입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오신 이유는 중생들이 모두 여래(如來)의 그윽한 덕상(德相)을 다 지니고 있건만 하나도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어서 그걸 가르쳐 주기 위해서 나오신 겁니다. 이것을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고도 하고 불지지견(佛之知見)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나오셨다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나 짐승이나 이 세상에 생명을 가지고 사는 것들은 모두가 이 하나인 생명을 모르기 때문에 전부가 생명이 부족한 겁니다. 전체의 생명을 버려 버리고 모기면 모기, 파리라면 파리, 적은 몸뚱이를 가지고 자기라고 여기고 있으니까 항상 허전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깨닫지 못한 생각 그것이 마음에 가서 밑자리가 되어 치(痴)가 됩니다. 행동을 하면 탐(貪)이 나와요, 탐하다가 안 되면 진심(嗔心)을 내는 겁니다.

 

어쨌든 생명은 하나인데, 이 생명이 업을 따라서 달리 됐다는 말입니다. 업이란 행동을 말하는 겁니다. 우리는 모르면 업을 짓게 되는 거예요. 잘 모르고 하는 행동의 결과 괴로움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이걸 업연(業緣)이라고 합니다. 우리 몸뚱이에, 생활에 고(苦)가 따르는 것은 생명의 정체를 바로 깨달아 가지고 그것에 순응했으면 그러지 않았을 터인데, 그걸 몰라서 어긋나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괴로움이 나온다는 것은 다 잘 아는 사실입니다.

 

우주 전체의 생명체는 하나인데, 그것이 하나로 통하지 못하고 사무치질 못하니까 사무쳐진 그 무엇이 망울져서 밑자리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눈을 감으면 어둡고 눈을 뜨면 환히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눈을 감으면 어두운 기운이 생기고 눈을 뜨면 이것이 사그라지고 밝은 기운이 생기는 줄 알지만 어두운 기운이나 밝은 기운이 따로 생기는 게 아닙니다. 어두운 기운이나 밝은 기운이나 본래 없는 것입니다.

 

원래가 없는 것을 우리의 어긋나는 생각에서 어두워 보이고 밝아 보이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물건도 본래 없는 거예요. 그것을 깨닫지를 못하면 어리석은 생각이 들어 버리는 거예요. 그러니 고생이 된다는 말이지요. 이 내 생각이 어떻든 전체 우주에 사무치질 않는 거예요.

 

미(迷)하다는 건 모른다는 소리입니다. 우리 생명체가 만물 속에 들어 가 만물을 살리지만 우리에게 그 생명체는 보이질 않아요. 전체엔 사무치질 못 하니까 모기면 모기, 파리면 파리, 사람은 사람대로 뭔가 각기 작은 것에 집(執)해서 이것이 내 것이라는 생각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체의 생각에 사무쳐서 이 허공에 끝이 있는 것, 이치가 있다면 이치가 있는 끝까지 사무쳤을 때 그걸 반야의 지혜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달리 보리(菩提)라고도 하지요.

 

이렇게 되질 않으니까 물체는 없지만 뭔가 막혀 있어요. 전체에 통한 생각을 반야의 지혜, 보리, 열반이라 하는데 대해 그것이 안 된 우리는 무엇인가, 어딘가 막혀있기 때문에 그걸 가리켜 무명(無明)이라고도 하고 그걸 식(識)이라고도 합니다. 통하지 못한 생각에 뭔가 망울이 져서 거기서 이게 꿈과 같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잠을 깼을 때, 그건 잠을 깨는 것이지 마음이 깨는 건 아닙니다. 잠을 깼을 때에는 산도들도 보이나 잠이 들면 아무 것도 보이질 않습니다. 잠이 들면 꿈이 생기고 꿈이 생기면 꿈속의 생각이 일어납니다. 이걸 몽상(夢想)이라고 해요. 그래서 꿈속에서도 자신의 몸End이가 있고 천지만물이 또 생겨 나오는 겁니다. 즉 몽심(夢心)과 몽경(夢境) 즉 꿈의 경계가 생겨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꿈 하나 생각이 어리석기 때문에, 꿈 하나 생각이 벌어지면 즉, 콩알이 벌어지면 둘로 벌어지고, 글 중간에 새싹이 나오는데 그것이 흡사 우리 마음과 같은 겁니다. 우리 마음에 새싹이란 게 식(識)이 양쪽으로 벌어지듯 생각이 벌어지면 안으로 육신이 보이고 밖으로 저 천지만물이 보이는 겁니다. 이건 실물(實物)이 있는 것도 아닌데 제각쯤 사람의 몸뚱이가 생기고 사람의 보이는 지혜가 생기고, 벌레면 벌레의 몸뚱이가 생기고 그러니까 벌레의 지혜도 생기는 겁니다. 그걸 근. 진. 식(根 .塵. 識)이라고 합니다. 깨닫지 못한 생각이 망울져서 식(識)이 되고 식(識)이 망울져서 그 식(識)이 행동을 하면, 이걸 업(業)이라고 합니다. 또 안으로 육신이 있어 보이는데 이걸 육근(六根)이라고 그러는 겁니다. 밖으로 육진(六塵), 즉 안. 이. 비. 설. 신. 의(眼. 耳. 鼻. 舌. 身. 意)의 여섯 가지 경계가 보이게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깨닫지 못한 것이 식(識)이 되어서 그것이 갈라지면 안으로 몸뚱이 생명, 밖으로 몸뚱이를 접촉해 주는 경계, 즉 육진(六塵)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깨닫지 못하면 안으로 육근(六根), 밖으로 육진(六塵), 중간에 육식(六識)이 생겨서 모두 18계(십(十八界)가 생겨 버립니다.

 

깨닫지 못해서 18계가 생겨 가지고 제 작기 18계의 테두리를 쓰고 보니까. 이 세계 만물이 제각각으로 쪼개지는 겁니다. 그래서 눈에 비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괴롭다. 귀로 소리 듣는 것도 그렇고 코로 냄새 맡는 것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낙(樂)으로 아는 것은 입에는 부드럽고 맛있고 달고 좋은 것만 넣어 달라 하고 몸에는 부드럽고 훈훈하고 보기에도 좋은 것을 입혀 달라 합니다.

   

산다는 것이 알고 보면 이렇게 시답지 않은 것이올시다. 그러면 우리가 밖으로 행동해서 이런 욕망의 구멍을 채우기보다 영구적으로 장구하게 즐거움을 얻으려면, 이 몸의 육근, 육식이 어떻게 생겼나 하는 것을 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숨을 쉬는 사람은 살고, 숨을 안 쉬는 사람은 죽었다고 할 것 같으면, 선문(禪門)에서는, ‘그놈의 코가 병이로구나, 그놈의 코를 문질러 버려라, 타파비공(打破鼻孔)이라, 콧구멍을 때려 없애 버리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고생거리가 뭔고 하니 깨닫지 못한 그놈이 맺혀서 벌어져 가지고 꿈처럼 식(識)이 생기고 식(識)이 생겨서 안으로 육근(六根)의 몸뚱이가 생겨 있고 밖으로 육진(六塵)이 생겼으니 이걸 없애야 될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조사 스님 네 들이나 달마스님 같은 분도 모두 그걸 없애는 방법을 말씀하신 거예요. 어째 됐든지 이게 문제입니다. 깨닫지 못하면 근. 진. 식이 되어 가지고 하나인 생명 속에서 제각기 하나씩 테두리가 생겨 가지고 내다보는 것에서 모든 차별세계(差別世界)가 나왔다는 겁니다. 이건 어느 철학에서나 종교에서나 여기까지는 똑 같습니다. 철학을 연구한 사람도, 근본 본체는 하나인데 끄트머리에 가서 차별이 생겼다고 하는 건 똑 같습니다.

 

부처님이 왜 이 세상에 나오셨느냐,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위해서 나왔다. 일대사란 뭐냐. 중세의 그 테두리 쓴 18계, 그 놈을 없애주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말하자면 불지지견(佛之知見)을 부처님의 지견을 알려주기 위해 나왔다, 이말 입니다.

 

사업으로는 일대사 인연이라고 하지마는 그 사상으로는 부처님의 사상, 불지지견이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18계의 작용을 휘둘러 쓰니까 차별로 되지만 부처님은 깨닫고 보니까 생명이 하나뿐이라는 겁니다.

 

법화경 첫 장을 젖히면 부처님이 미간(眉間) 백호상광(白毫相光)을 한번 놓으니까 동방으로 일만 팔천 국토를 비치더라, 비추니까 그전에 안 보이던 것이 다 보이더라, 어떤 중이 나무 밑에서 참선을 하는 것도 보이고 못가에서는 앵무 와 공작이 기웃거리는 것도 보이고, 모두가 희한하게도 안 보이던 것이 보이더라. 이겁니다.

 

그건 무슨 소리인고. 하니 불을 끈 방에서는 아무 것도 안 보이지만 불을 켜 놓으니까 방안의 것이 다 보이더라. 바로 이 소리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18계(十八界)라는 테두리를 쓰고 보니까 전부가 캄캄해서, 미(迷)해서, 있는 게 안 보이는 겁니다. 부처님의 미간 백호상은 깨달은 생각입니다. 깨달은 생각으로 동방을 비추니까 우리 중생들도 그걸 따라 가지고 안으로 육근, 밖으로 육진, 중간에 육식이 사그라져서 그게 좀 생기니까 만팔 천토라 쓴 겁니다. 18계가 무너지고 나니까 그전에 안 보이던 것이 다 보이더라, 중생의 눈으로는 안 보이던 것이 부처님의 지견을 열고나니까 다 보이더라, 그렇다면 하나로 보이는 것이 불지지견이고, 여러 가지 차별로 보는 것은 중생의 지견인 셈입니다. 부처님이 나오신 것은 바로 중생의 지견을 없애주기 위해서 나왔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사업으로는 일대사 인연이라 큰 사업이지만 그걸 사상으로 보면 불지지견을 가르치기 위해서 나왔고, 달마도 그걸 가르치기 위해서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왔다, 이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부처되기가 매우 어려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삼천대천세계가 전부 사그라지고 근. 진. 식이 녹아진 세계가 부처님 세계입니다. 우리가 꿈을 꾸면 꿈이 보이듯이 깨질 못하니까 언제든지 상대(相對)가 되어 있어요. 식(識)을 가지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식을 가지면 안으로 육근과 밖으로 육진이 언제든지 보입니다. 떨어지지 않고 보여요. 아무리 없애려고 해도 그것이 나타납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사는 거지요. 근. 진. 식의 세 가지 18계만 없애 버리면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 몸뚱이를 생명으로 알기 때문에 이 몸뚱이가 우환거리입니다. 우리는 이 몸뚱이 때문에 걱정 많이 합니다. 이 몸뚱이를 생명으로 알기 때문이지요. 그 외엔 아무 것도 없어요. 몸뚱이 죽으면 남편도 없고 자식도 다 없어져 버리지요.

 

세상의 학문이라는 것은 모두가 육진과 육근을 상대해서 거기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좋고 나쁜 것을 계량(計量)하지만 이놈을 전부 없애버리고 이놈을 탕진시킨 다음에 안으로 나(我)라는 생각과 밖으로 저 만물이 실로 있다고 하는 생각을 - 이걸 아집(我執), 법집(法執)이라고 합니다. - 이러한 아집, 법집이 탕진되어 없어지고 주관, 객관이 없어지고 두 가지가 다 없어진 다음에 나타난 경계, 저 하늘에 옅은 구름과 짙은 구름이 끼어 있을 때 옅은 구름과 짙은 구름이 사라져 버리면 햇빛이 보입니다.

 

두 가지가 없어져 버리는 바람에 생기는 달빛, 햇빛, 그걸 보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광명을 보는 것입니다. 그걸 얻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얻느냐, 이건 딴 방법으로는 안 됩니다. 그저 유(有)를 물으면 유를 대답하고 무를 물으면 무(無)를 대답하는, 육근에 맞춰서 설법하는 것, 세상 학문은 그것에 지나지 않는데, 부처님의 진언이나, 조사(祖師)의 화두(話頭)는 그게 아닙니다. 이것은 근진식이 탕진된 다음에 두 가지가 공(空)한 바람에 나타나는, 그 햇볕 쬐고 달빛 쬐는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사(生死)를 떠나 가지고 이쪽은 생사가 있고, 저쪽은 생사가 없는 그쪽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겠습니까?

 

부처님의 진언 중에 「옴남」이라고 법계를 깨끗이 하는 정법계(淨法界) 진언(眞言)이 있습니다. 법계는 우리의 마음자리라, 마음자리를 깨끗하게 해서, 「옴남, 옴남」자꾸 외우고 앉아 있으면 마음속의 탁한 생각이 다 사그라져 버리고, 그 진언과 - 진언은 깨달은 생각이니까 - 합일될 때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조주(趙州)스님같은 이는 공부를 하다가 근. 진. 식 세 가지가 탕진이 되었어요. 그래 어떤 사람이 와서 묻기를 “어떻게 하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알 수 있을까요?”라고 하자 “뜰 앞의 잣나무”라는 거예요. 이건 근. 진. 식을 상대해서 나온 소리는 아닙니다. 이건 그것을 초월해서 근. 진. 식이 녹아진 다음에 나오는 소리입니다.

 

진언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렇듯이 우리는 그 자리는 눈으로 알 수도 없고 귀로 알 수도 없고, 마음으로, 인식(認識)으로도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인식이 끊어진 자리에서 나왔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의식은 물 흐르듯 자꾸 흘러가고 있어요. 지금도 우리 몸에서 맥이 뛰고 있는 것처럼 흐르고 있어요. 이건 속에 생사(生死)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그 기운으로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이 몸뚱이를 생명 전체로 알고 이런 소리를 하면 큰 낭패이겠지만 몸뚱이가 생명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전제한 바 있습니다. 몸뚱이는 이게 생명의 발자국이자 흔적이에요. 예컨대 우리가 붓을 가지고 호랑이를 그리든지, 사람을 그리든지, 그림을 그리는 것은 그 사람의 작품이지 생명 그 당체는 아닌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명을 가지고 작품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우리들의 오온(五蘊)으로 된 몸뚱이인 것입니다. 작품은 그 생명의 당체가 아닙니다.

 

그래서 좋은 일을 자꾸 하면 얼굴이 좋게 된다는 겁니다. 작품이 좋아진다는 말입니다. 나쁜 짓을 하면 얼굴 모양이 악한 모양으로 변해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건 작품이라는 거예요. 작품을 가지고 생명으로 알아서는 안 되는 겁니다. 우리는 작품을 가지고, 업(業)을 가지고, 업상(業相)을 가지고 자꾸 생명으로 알아버려요. 업의 그림자를 가지고 말입니다.

 

뜰 앞의 잣나무라, 또 다른 화두고 있습니다. 운문(雲門)선사가 하루는 누가 깨를 서너 근 가져 왔기에 그 깨를 갈아서 죽에 넣어 주면 고소한 것이 나을 것 같아서 식전에 그걸 갈고 앉아 있는데 어떤 시자(侍者)가 쫓아오더니, ‘스님, 어떻게 하면 부처가 됩니까?’ 라고 묻자 ‘마 삼근이라,’ 했다는 겁니다. 삼 마자를 쓰는데 그건 삼이 아니라 깨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삼 서근 이란 소리가 아니라 깨 서근 이라는 소리입니다. 요새 선방에 가면 그걸 삼 서근 이라고 하는데 깨 서근 입니다.

 

수초스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숨을 쉬거나 손을 흔들거나 그것이 전부가 깨달은 소식인 그런 분이었어요. 물으니, 깨 서근 이라 했는데, 수초 수님의 깨달은 기운이 그 속에 다 들었던 것입니다. 그건 깨달은 소리기 때문에 육근을 가지고, 눈. 코. 귀. 입으로나 몸으로나 뜻으로나 알바가 아닌 것입니다. 이건 적어도 근. 진. 식 세 가지가 소탕된 속에서 나온 소리기 때문에 부처님의 진언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게 뭔고 하고 마음으로 이렇게 궁구하면 마치 은단을 입에 넣으면 약 기운이 도는 것처럼 그 화두에는 깨 기운이 들어 있으니까 그걸 마음에 품고 생각하고 앉아 있으면 그 기운을 우리가 알게 되지요. 그러면 얼마 안가서, 화두를 들다보면 식이 녹아지고, 식이 녹아지면 우주법계의 전 생명이 탁 터지는 것입니다. 근. 진 .식이 탕진이 되어서 그래서 부처가 되는 방법입니다.

 

여러분들은 그저 스님들 시키는 대로 화두를 자꾸 들어보십시오. 화두는 근과 식이 경계를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따지는 게 아닙니다. 근. 진. 식으로 따져 나가는 것은 시계의 톱니바퀴와 같은 것입니다.

   

시계를 분해해 보면 톱니바퀴가 두 개가 있어요. 하나는 크고 하나는 적지요. 시계바늘은 이 톱니바퀴를 안고 돌아가는 바람에 돌아간단 말입니다. 우리의 눈은 안식(眼識), 안식은 안 경살을 따라 궁굴고, 소리, 귀는 이식(耳識)을 따라 궁구는 게 시계의 톱니바퀴와 같아요. 그렇다면 톱니바퀴가 못 돌아가게 정지를 시게의 톱니바퀴와 같아요. 그렇다면 톱니바퀴가 못 돌아가게 정지를 시키려면 어떻게 하느냐, 그건 못 돌아가게 하면 되는 겁니다. 못 돌아가게 하는 그 방법이 화두입니다. 마음도 흘러가면 이게 온전치를 않아요. 물이 흘러가는 것을 막자면 둑을 만들면 되겠지요. 둑을 막으면 물이 모여가지고 물의 본 테에 들어가면 옆에 것이 환하게 비칩니다. 흘러가는 생각을 멈추게 하는 것이 화두인 것입니다. 화두를 들면 마음이 흘러가질 않아요. 흘러가는 물을 막듯이 화두로 흘러가는 마음을 딱 막아버리면 흘러가질 못하니까 마음이 한데로 고이게 되는 것입니다. 고이면 나중에 근과 식이 녹아져 버려요. 이 몸뚱이도 없어져 버리고 몸뚱이도 이게 잡생각으로 인해 그 그림자로 나타난 것이니까 - 그림자라는 것은 밝은 기운만 들어가면 녹아져 버리는 것 아닙니까 - 그림자라는 것은 밝은 기운만 들어가면 녹아져 버리는 것 아닙니까. 열심히 화두를 들고 또 염불을 열심히 하십시오. 염불을 해도 됩니다. 염불하면 잘 안 된다는 것 잘못된 소리입니다.

 

부처님을 생각하고 자꾸 염불하면 부처님이 됩니다. 우린 무엇이든 생각하는 대로 되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부처가 되려면 부처생각하면 되는 거예요. 또 쉽게 되려면 화두를 들면 되는 겁니다. 또 우리가 ‘이게 뭔고’하고 찾다보면 생각이 안 흘러가니까 한 군데 모이게 됩니다. 비유컨대 풍선을 불면 그 속에 공기가 들어가는데 그 기운이 자꾸 들어가서 풍선이 터져버리면 풍선 밖이나 안이나 하나가 되어버려요. 이렇게 하나가 되듯이 자꾸 화두를 들다보면 그것이 풍선에 바람 넣는 것과 같아서 마침내 육근과 육식이 툭 터져버려요. 터지면 대천세계가 그만 하나인 것입니다. 생명이 하나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 생명과 남의 생명을 따로 보는 게 아니라 내 생명이 사랑하듯이 남의 생명도 똑같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한 덩어리, 동체(同體)로 깨달아져야 내 몸 사랑하듯이 남도 사랑해서 대비(大悲)가 일어나는 법이올시다. 동체를 깨닫지 못하면 동체대비가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출처 :아름다운 60대 원문보기 글쓴이 : 실버스타

출처 : 나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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