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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명장열전

雲光 2009. 9. 14. 16:40

음~~~ 하나씩 역사상 위대했던 명장들을 나열하려합니다.

과거 황제부터 일반 장수까지 지략과 용맹을 과시했던 인물들이 많았습니다.

지금와서는 묻혀버린 이름이 없어진 용장부터 시작해서 이름이 자주거론돼는 용장까지 그들의 일대기를 나열하고자 합니다. 그 첫째로 바벨로니아의 왕 네부카네자르2세 (성서에서는 느부갓네살왕)에 대해 알아보도록하겠습니다.

*바빌론의 황태자와 그의 군대가 시리아의 갈그미스에서 파라오 느고휘하의 이집트를 격퇴한다.(느부갓네살의 (서판)역대기: 느부갓네살 연대기는 갈그미스 전투 뿐 아니라 예루살렘을 공격한 것을 구체적으로 적고 있는데, 이것에 관한 번역은 1956년에 D. J Wiseman 교수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연대기의 박물관 번호는 21946번이다. 이 역대기의 내용은 「Akkad 왕 (Nabopolassar) 제 21년에 그의 장남이자 왕위를 승계한 느부갓네살은 군대 소집을 하고 이집트 군대를 대항하기 위해 갈그미스로 진군했고...

바벨론 군대는 그들을 완전히 제압했다... 그리고 하티 (Hatti)나라의 모든 지역을 정복했다」라고 한다.

여기서 "하티"란 팔레스틴을 포함하는 것이며 느부갓네살이 사용한 용어이다.) 패배한 이집트군대는 남쪽으로 이집트를 향하여 도주하고, 바빌로니아 군대는 그들을 추격한다.

그러나 승리를 거둔 황태자는 바빌론에서 온 전갈 때문에 어쩔수없이 추격을 포기한다. 아버지인 나보폴리사르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어왔기때문이었다.

황태자인 그는 사로잡은 자들과 강탈물을 끌고 올 책임을 휘하의 장군들에게 맡긴채, 급히 바빌로니아의 수도로 돌아가 공석이었던 왕좌에 앉는다.

때는 기원전 624년 추정개월은 여름으로 알려져있던때에 그는 신 바빌로니아의 두번째 왕이 돼었고 43년간의 기나긴 통치의 서막이 돼었던것이다.

그는 과거 아시리아 제국을 허물어뜨리고 강국을 자랑하던 아시리아의 영토들을 하나씩 흡수하며 영토를 넓였는데 북쪽으로는 시리아,서쪽으로는 팔레스타인과 이집트까지 점령하게돼었던것이다.

그의 통치 4년(기원전620년)에 유대왕국(이당시 유대는 두계파로 나뉘어 북쪽은 이스라엘왕국 남쪽은 유대왕국으로 분열돼었고 이스라엘왕국은 이전에 앗시리아에게 멸망돼었다.)을 속국으로 만들게 돼었다.

하지만 3년뒤 유대지방과 그 지역들을 정복하게돼었고 이어 수만은 포로들과 제물들을 가지고 돌아갔으며 새 왕으로 시드기야를 세우게 돼었다.( 예루살렘의 1차 침공을 받았을 때 유대의 왕은 "여호야김"이었다.

역대기의 내용은 계속 말하기를 "597BC에 그가 다시 예루살렘을 공격했으며, 조공을 받고, 보물을 노략했으며, '여호야긴'을 잡아가고 또한 10,000명 정도의 다른 포로들과 짐승들도 끌고 갔으며 '시드기야'를 꼭두각시 왕으로 세운 사실이 있다"고 한다.

이 서판은 여호야긴이 포로된 후 바벨론에서 그의 5 아들과 함께 월급을 공급받았다는 기록도 보인다.

592BC 날짜로 기름 영수증 3장도 발급했다고 한다.)하지만 기원전 607년에 유대왕국은 이집트왕국과 동맹을 맺으며 독립을 하려하게 돼자 그는 다시금 일어서 유대왕국을 멸망시키게 됀다.

이것이 바벨론의 유수라고 일컬어지는 사건이다.

이후 네부카네자르 2세는 앗시리아에게 멸망한 페니키아의 수도 티레를 공략하기에 이른다.

당시 티레의 도시는 육지로부터 800미터떨어진 섬이 수도였기때문에 앗시리아에서도 그곳을 공략하는것을 꺼려했던것으로 금석문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이 티레를 13년간 포위공격하므로 항복을 받아내게 됀다.

그는 행정가로써도 단연돚보이는 행적을 남겼는데 외지의 포로들을 교육시켜 행정관으로 채용하기에 이른다. 느부갓네살 연대기라는 금석문을 보면 그는 페니키아 이집트 유대의 젊은이들을 교육시켜 적절한 장소에 배치시켰으며 그들은 그곳에서 충실히 사명을 다했다는 기록을 볼수있기때문이다.

또한 성서에서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볼수있는데 그점은 성서기록(다니엘1:6,7,19-21절,2장 49절)에서도 볼수있다.

그의 능력은 장군이며 행정가이며 또한 건축가이기도 했는데 그가 건축한 건물들중에는 당대에 가장 큰 성벽을 가진 도시 바빌론을 제건한것으로 대표됀다.

그 건물은 2중으로돼어있는 성으로써 벽의 높이는 100미터 너비는 25미터이었다. 당시로써는 가장 커다란 성이었으며 유프라테스 강을 해자로 사용하였고 수성을 위해 20년분의 식량을 비축해 당시로서는 난공불락의 성으로 유명하였다.

바벨론성 함락당시 페르시아의 왕이었던 키루스왕은 이성을 보며 말하기를 ("20년정도 걸려야 넘어가겠군 이라는 말을 남겼을정도로 절대적이었다고 한다.

수성용 식량이 20년분이라는것을 잃지않기를") 금석문을 보자면(성 둘레는 96Km이고, 성벽 높이는 100m이며, 두께는 25m이다.

성벽사이에 400m의 수로가 있고, 250개의 초소와 100개의 놋쇠 문이 있다.유프라테스강과 연결된 문이 25개이고, 강 밑으로 높이 4m, 폭이 5m, 지하 터널이 있다. 폭이 10m, 길이가 800m의 다리가 있다.)

그는 또한 고대세계의 7대 경의 중 하나인 공중정원을 만든것으로 유명하다.

사실 그것은 메디아출신의 왕비가 향수병이 들자 그것을 고치기위해서 공중정원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통치는 태평성대였고 이후 다른왕들은 권력다툼등을 통해서 많은수가 죽어가며 국력쇠퇴를 거듭했지만 당시 신 바빌로니아의 영토며 기타 모든지역을 통합하는데 그의 노력은 절대적이었다고 말할수있겠다.(금석문의 기록:BC6 세기경에 네부카드네자르(성경: 느부갓네살) 2세(BC 605-562 재위)가 만든정원으로 멀리서 보면 공중에 떠있는 것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메디아(메대) 왕국에서 시집온 '아마티스'는 삭막한 바벨론을 보면서 아름다운 고향의 푸른 언덕을 그리워하여 왕이 왕비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바닥은 가로 400(m) 세로 400(m)에 높이 15m이고 층수가 7층으로 계단식 발코니(테라스)로 정원 밑에는 서늘한 방을 만들어 정원을 감상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 전체 모양은 피라미드 형이다.

층마다 꽃, 덩굴식물, 과일나무를 심어 무척 아름답게 꾸며 놓았고, 물은 유프라테스 강에서 펌프로 마지 막 층의 옥상 물탱크까지 올려서 쓰고, 따로 필요 한곳은 물뿌리개로 주었다고 한다.멀리서 보면 동산 같았다고 한다.)

그러한 노력이 있고나서 얼마후인 기원전 582년 가을 그는 노년의 기력을 다한체 바베로니아의 2대왕으로 숨을거둔다.

저번 무장열전의 상대는 서아시아의 최강이라 불리우는 신바벨로니아의 네부카네자르 2세 였습니다.

이번에 다룰 인물은 반대쪽에서 살았던 인물인 강여상 흔히들 강태고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제부터 그의 인생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래의 성은 강(姜)이고, 이름은 상(尙)이다.

문왕의 아버지 태공이 오래도록 기다리며 바라던 사람이라 하여 태공망 또는 강태공이라고도 부른다.

위수가에서 세월을 낚으며 때를 기다리던 그는 문왕을 만나 등용되었고,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창건하였다.

그후 성왕에 의해 제나라의 제후로 봉해졌다. 그는 병학의 원조로 받들어지며, 당나라때 공자의 문묘와 함께 무묘에 배향되기도 하였다.

[백과사전참고]
{태공망의 본명은 강상(姜尙)이다. 그의 선조가 여(呂)나라에 봉하여졌으므로 여상(呂尙)이라 불렸고, 속칭 강태공으로 알려져 있다.

주나라 문왕(文王)의 초빙을 받아 그의 스승이 되었고, 무왕(武王)을
도와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하였으며, 그 공으로 제(齊)나라에 봉함을 받아 그 시조가 되었다.

동해(東海)에서 사는 가난한 사람이었으나, 웨이수이강[渭水]에서 낚시질을 하다가 문왕을 만나게 되었다는 등 그에 대한 전기는 대부분이 전설적이지만, 전국시대부터 한(漢)나라 시대에는 경제적 수완과 병법가(兵法家)로서의 그의 재주가 회자되기도 하였다.

병서(兵書) 《육도(六韜)》(6권)는 그의 저서라 하며, 뒷날 그의 고사를 바탕으로 하여 낚시질하는 사람을 태공망 혹은 태공이라 하는 속어가 생겼다.}

그러면 그가 썼다고 하는 육도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할것이다.

육도는 문도(文韜),무도(武韜),용도(龍韜),호도(虎韜),표도(豹韜),견도(犬韜)의 6권 60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책이다.

제목의 도(韜)는 본래 활이나 칼을 넣어두는 활집이나 칼집을 가리킨다.또한 '거둔다','싼다','감추다','곳간','창고'라는뜻도 있다.

이런뜻이 발전해서 지해의 보고,가슴속에 감추고 있는 비책이라는 의미로 확대되어쓰였다. 결국'육도'란 "천하를 다스리고 군대를 움직이는 여섯가지 비책"으로 풀이할수있다.

이것으로 그의 저작인 육도에 대해서 알아볼수있을것이다.

현제 수많은 고고학자및 역사학자들은 그가 언제태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알지못한다. 다만 '고본죽서기년(古本竹書紀年)'에 "주나라 강왕 6년(기원전 1073년)에 태공망이 죽었다."는 기록만 보일뿐이다.

또 울료자(중국진나라의 명장 진나라통일에 이바지한인물 그의 저서 울료자는 무경7서중 한권으로 알려져있다.)의 '무의(武議)'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있다.

"강태공은 나이 70살에 은나라의 수도인 조가(朝家)에서 소잡는 백정노릇을 하였고, 맹진(孟津,지금의 하남성 맹현지역)에서 밥장수를 하고있었다.

70살이 되도록 그의 재능을 인정해 주는 군주가 없어, 그가 나라를
위해서 의견을 올리면 사람들이 모두 그를 미친 늙은이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문왕을 만나자, 전군을 이끌고 목야(牧野)의 들판에서의 일전으로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평정하였다."

또한 맹자 이루(離婁)편에는 태공이 은나라 주왕의 폭정을 피해서 동해가에 살다가 문왕이 떨쳐 일어나자, 천하의 존경을 받는 원로로서 귀의하였다는 구절이 보인다. 이러한 기록을 모아서 미루어보면, 태공은 주왕 15년(기원전1140년)에 72살이나 73정도의 나이로 문왕을 만난 것으로 보이며,그가 태어난 때는 대략 기원전 1212년 즈음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무튼 태공은 동해가에 숨어살았다는 기록 외에 육도의 문도-문사를 보면 위수(渭水)에 숨어 지내며 낚시질로 세월을 보내다가 문왕을 만나는 과정이 전설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또한 [사기(史記)]-제태부세가(齊太夫世家)에 조금 더 자세히 쓰여져 있다.

그 기록 가운데 태공망이라는 호칭의 유래가 문왕의 입을 통해서 밝혀지고 있는데 내용은 이렇다."나의 돌아가신 아버지 태공에게서 '성인이 주나라로 올 것이다.

주나라는 그의 덕택으로 일어나리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대야말로 그 사람이다. 나의 아버지 태공이 당신을 기다린 지 오래되었다."

그에 대한 기록을 비추어보았을때 태공망이 주나라에 들어간것은 늙으막했을때였고 그의 일화는 아버지에게서 아버지의 아버지에게서 전승돼어가고 있다.

아마도 그의 노력이 절대적이었다는 기록이었다고 볼수밖에 없다고 말할수있을것이다.

이번에 이야기 할 주인공은 춘추시대의 명제상이었던 관중에 대해서 알아볼것입니다.
관중하면 생각나는것이 관포지교가 먼저 생각날 것입니다. 하지만 관중은 춘추시대의명제상으로 전국시대의 악의와 함께 관.악으로 손꼽히는 사람입니다.
삼국지에서도 그부분에 대해서 자세하게 나왔는데 강동의 명인으로 꼽히던 사람인 장소가 제갈량에게 물어보던 대목이다.
(장소가 먼저 그런 공명의 기를 꺾어 보려는 듯 입을 열어 넌지시 걸고 들었다."장소는 강동의 보잘것없는 선비올시다만 선생께서 융중에 높이 누워 지내신다는 소문은 일찍부터 들어 왔습니다. 그때 선생께서는 스스로를 관중(管仲)과 악의(itst) 에 견주셨다는데 정말입니까 ?")
이것은 관중이 이당시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는지를 알려주기위한 한대목일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일대기에 대해 한번 알아보기를 원할것이다.

때는 동주말기이면서 춘추시대초기 관중은 제나라에 관리로 몸을 담고있었다.
그는 제나라의 왕위계승권을 가진 두명의 왕자중 한명인 공자 규에게 몸을 담고있었고그의 벗 포숙아는 규의 이복 동생인 소백(小白) 의 측근으로 있었는데 기원전 686년 여름 당시 제나라의 왕이었던 양공이 사촌 동생 공손무지 (公孫無知)에게 시해돼는일이 있게되었다.
이에 죽음을 모면하려던 규와 소백은 노나라로 망명해버렸고 그들을 따라 같이 망명길에 올랐던것이다.
하지만 이듬해 공손무지또한 암살당하게 돼자 노나라로 망명했던 두 공자는 서로 군위를 다투어 귀국을 서둘르게 된다. 이렇게 해서 관중과 포숙아는 본의 아니게 정적이 되어버리고 말았던것이었다.

왕자 규와 소백이 서로 암투를 하던끝에 관중은 소백을 향해 화살을 날리게 돼었고 소백의 허리띠에 맞아 그는 살게 돼었지만 그 원한은 사그러 들지 않았고 계속남게 돼었다.
소백은 왕자 규보다 먼저 제나라에 귀국하여 자신을 환공이라 일컫고 노나라에 머물고있는 왕자 규를 죽일것과 아울러 관중을 제나라로 압송요구했고 이어 관중에 대한 원한을 풀기위해 직접 처형을 갔기로 했지만 포숙아는 그를 만류하며 "전하, 제(齊) 한 나라만 다스리는 것으로 만족하신다면 신(臣)으로도 충분할 것이옵니다. 하오나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시려면 관중을 기용하시옵소서."란 말로 그의 원한을 끝맺는다.
이어서 관중을 기용하여 대부라는 벼슬을 내리고 정사를 맡기게 돼었는데 그의 정치는 과감하였고 대단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군사력의 강화와 상업,수공업의 육성을 꾀하였고 이를통해 부국강병을 이룩하게돼었다.
당시에 대한 기록을 알려주는 사기 관안열전에서는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안다 [倉弟實則 知禮節]','의식이 풍족해야 영욕을 안다 [衣食足則知榮辱]')라고 알려주고있다.
그는 강한 국사력을 이용하여 대외적으로 동방이나 중원(中原)의 제후(諸侯)와 9번 회맹(會盟)하여 환공에 대한 제후의 신뢰를 얻게 하였으며, 남쪽에서 세력을 떨치기 시작한 초(楚)나라를 누르려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책 한권이 있는데 이 책은 '관자'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관자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관자는 당시 제나라의 영웅으로 알려졌던 관중을 칭송하기위해 후대 사람들이 썼다고 알려졌고,전국시대를 거쳐한나라때에 걸처서 저작돼었다는 견해가 크다. 전한(前漢)의 학자 유향(劉向)의 머리말에는 86편이라고 되어 있는데, 현재 보존되어 있는 것에는 10편과 1도(圖)가 빠져 있다. 내용은 법가적(法家的) 색채가 농후하고, 때로는 도가적(道家的)인 요소가 섞여 있기 때문에 《한서(漢書)》에서는 도가(道家)에,《수서(隋書)》에서는 법가(法家)에 넣고 있다. 정치의 요체(要諦)는 백성을 부유하게 하고, 백성을 가르치며,신명(神明)을 공경하도록 하는 세 가지 일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일이 으뜸이라고 가르치고 있어 당시 나라를 통일하는일이 어떤것에 관련하는가를 열실히 알려주는 계기가 됀다고 볼수있겠다.

본인의 생각은 이러한 관중의 기록을 통해서 또한 그에대한 기록을 통해서 당시 수많은 법가인들에게 교육을 배풀게 돼었고 상앙의 2차례에 걸친 변법과 오기의 혁신과 과단적인 개혁들은 아마도 관중에 의한것이라는 견해가 크다.

음 이번에 작성하는데 오류가 있었군요 제 실수를 용서해주세요 ㅜㅜ
이번에 다룰 인물은 라틴아메리카의 영웅 시몬볼리바르입니다.

라틴 아메리카 독립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 누구냐고 물으면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은 주저하지 않고 시몬 볼리바르와 산 마르틴을 든다. 볼리바르는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입으로 야기된 상황에서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등 5개국을 해방시켰다. 볼리비아라는 나라 이름은 볼리바르를 기념해서 명명된 것이다. 산 마르틴은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칠레 등 남미 남부를 해방시켰다.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도착한 이래 300여 년 동안 라틴 아메리카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통치에 대한 커다란 무력 저항은 거의 없었다. 영화 <미션>에서 보았던 것처럼 예수회 선교사들의 포교 활동(영혼의 정복) 덕도 있었을 것이고, 워낙 가혹한 스페인, 포르투갈인들의 통치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전근대적인 스페인 왕실의 압정에서 멋어나기 위해 라틴 아메카인들은 독립 투쟁의 과정에서 영국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영국인들이 라틴 아메리카 독립을 지원한 까닭은 스페인의 높은 관세 정책을 피해 좀더 넓은 시장을 필요로 했기때문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이 필요했다.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가 독립을 이룩하자 영국은 라틴 아메리카가 강성해질 것을 우려하여 고도의 분열정책을 펼쳤다.

그렇다고 해서 라틴 아메리카인들의 저항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도 우리가 해외 통신을 통해 테러조직의 이름으로 부활한 페루의 투팍 아마루를 비롯해서 아이티의 흑인인 투생 루 베르튀르, 크리오(criollo, creole: 식민지 아메리카에서 태어난 백인) 출신인 베네수엘라의 미란다와 브라질의 티라덴티스 등이 조직적인 저항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들의 뿌린 씨앗은 많은 라틴 아메리카인들에게 독립의 희망을 갖게 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는 1783년 7월 24일 유럽의 영향을 많이 받은 개방적인 도시 카라카스에서 태어났다.
볼리바르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동생 후안 비센테, 두 명의 누이와 함께 할아버지와 외삼촌의 보호하에 성장한다.
그리고 그는 부모로부터 광대한 농장과 노예를 재산으로 상속 받았다. 그는 시몬 로드리게스와 안드레스 베요 등에게 교육 받으며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 중 로드리게스는 루소의 추종자였다. 시몬 볼리바르는 로드리게스의 영향으로 자유와 정의, 기본권 사상 등 유럽의 선진적인 시민의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17세 되던 1799년 그의 할아버지가 죽자 볼리바르는 카를로스 4세의 통치하에 있는 스페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많은 재산을 상속받은 부유한 볼리바르는 카를로스 4세의 스페인 귀족사회에도 금방 포용될 수 있었다.
영화 <조로>를 생각해보면 이 시기의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 식민지 사이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약간의 도움이 될 것이다.
그는 마드리드에서 우스타리스의 집에 머물며 외국어, 수학, 무용, 승마, 역사 등을 공부했다. 북부 바스크 지방과 파리를 여행했다. 그리고 우스타리스의 조카딸인 마리아 테레사를 알게 되었다.그리고 두 사람은 1802년 19세의 나이로 결혼했다.
행복한 결혼이었으나 기쁨도 잠시 카라카스로 함께 귀국한 그의 아내 마리아 테레사는 결혼한지 8개월 만에 갑작스럽게 죽고만다. 볼리바르는 아내의 죽음 이후 죽을 때까지 다시는 결혼하지 않았다.
볼리바르는 다시 유럽으로 돌아간다. 파리에서 3년반의 기간동안 아내의 죽음에 절망하여 방탕한 생활했다.
그곳에서 볼리바르는 로드리게스를 다시 만나게 된다. 그의 옛 스승 로드리게스는 볼리바르에게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게 하고, 철학과 정치학 서적, 특히 몽테스키외, 루소, 볼테르 등 서구 시민 혁명의 지적 기반이 되었던 인물들의 저서를 읽도록 했다. 그는 이곳에서 많은 공부를 하며 세계 정세와 새로운 정치 사상을 접했다. 볼리바르는 프랑스 혁명 사상에
심취했다. 1805년 로드리게스와 함께 로마를 여행하며 볼리바르는 "나 자신의 명예와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내 조국의 이름으로 맹세한다. 나의 마음과 나의 팔뚝은 스페인의 권력이 우리를 속박한 그 사슬을 깨뜨릴 때까지 한시도 쉬지 않을 것이다."라는 맹세를 한다.

해방자 볼리바르와 라틴 아메리카

알렉시스 토크빌은『미국의 민주주의』란 저서를 통해 독립 후 미국의 활력에 대해 말하고 있다. 미국의 독립은 같은 아메리카 신대륙의 이주민으로서 라틴 아메리카인들에게 커다란 자극이 되었다. 우리가 우드로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자극을 받아 3.1 만세운동을 일으켰던 것처럼 라틴 아메리카인들 역시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과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에 크게 고무되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지식인들은 통치의 근거를 피통치자들의 동의에서 비롯된다는 사회계약론을 비롯한 유럽의 계몽사상을 일종의 복음처럼 받아들였던 것이다.

주권 재민, 인권, 국가의 독립과 같은 개념은 현재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지만 왕권신수설이 오랫동안 지배해온 17-18세기의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개혁사상이고 혁명적인 기운이었다. 당연히 스페인 본국은 이런 사상의 식민지 유입을 막기 위해 이런 계몽적인 사상을 담은 서적들을 금서(禁書)로 규정했다. 그러나 아무리 본국에서 이를 통제하더라도 한 번 불붙기 시작한 독립의 희망은 라틴 아메리카 전체에 퍼져나갔다. 거기에 덧붙여 식민지 본국인 스페인이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지며 식민지에 대한 지배력이 약화되었다.

또한 스페인의 본토우선주의, 중상주의 정책은 식민지 태생의 많은 크리오요들에게 불만을 품게 만들었다. 스페인은 식민지를 그 자체로서 발전시키려 하기보다는 스페인 왕실의 개인 금고처럼 여겼고, 본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식민지로 수입되는 외국의 물산에 대해 높은 관세 정책을 유지했다. 게다가 식민지에서 생산되는 상품 중 본국의 상품과 경쟁이 될만한 것들은 생산을 중지시켰다. 그런 이유로 스페인은 1595년부터 아메리카에서 포도 재배를 금지시키기도 했다.
스페인 본국의 포도주와의 경쟁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본국의 이런 태도는 라틴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물론이고, 어쨌든 라틴 아메리카에서 살아야 하는 크리오요들에겐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이미 정치적으로 각성한 식민지인들에게 본토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까지 오르는 길은 사실상 막혀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부유하지만 정치적 실권을 행사할 수 없는 모순된 정치 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스페인 본국의 보호 무역 정책으로 인해 우수한 경쟁력을 가진 상품을 가지고 있었지만 라틴 아메리카 시장에 진입할 수 없었던 영국도 이들 식민지인들을 지원했다. 볼리바르 역시 영국이란 외세의 힘을 빌어 스페인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나 큰 성과를 얻지 못하자 그는 라틴 아메리카인들의 독자적인 힘으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1810년 미란다 지휘하에 <애국의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1811년 7월 5일 독립을 선포했다.


독립전쟁을 시작하다.

당시 60세의 미란다는 총사령관에 임명되고, 볼리바르는 대령의 신분으로 발렌시아 전투에 참가했다.
혁명군은 스페인 왕실군과의 일전을 앞두고 뜻하지 않은 지진으로 인해 서전(緖戰)에서 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1812년 볼리바르는 <카르타헤나 선언>을 발표하고 새롭게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1811년 제1공화국의 실패 원인을 사회현실과 동떨어진 포용정책에 있었다고 생각하여 독립투쟁에 있어서 느슨한 연방제의 취약성을 지적했다. 그리고 그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던 이념가들을 신랄히 비판하고, 중앙집권화된 강력한 정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특정 지역과 국가가 아닌 라틴 아메리카 전체의 독립을 역설했다.

독립운동 진영 내부를 재정비한 후 벌어진 1813년 5월 이후의 전투에서 그는 승리했다. 그는 전투에서 훌륭한 전략가로서의 자질을 드러냈고, "정당한 대의를 위해서 압정에 맞서 싸우지 않는 스페인인은 어느 누구라도 적으로 간주될 것이며, 조국에 대한 반역자로서 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스페인인들이여! 죽음이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아메리카 해방을 지지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단순히 중립을 지키는 사람 또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라고 선언하며 독립에 대해서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던 다른 식민지 크리요오들을 다그쳤다. 우리는 그의 이 선언에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한 가지는 당시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이나 해방에는 원주민들에 대한 개념은 별로 없었다는 것과 아직까지는 스스로를 스페인인이라고 지칭하는 수준의 인식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볼리바르는 지금까지 스페인의 압제에 대해 어떻게 저항해야 할지 모르는 많은 식민지인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그들에게 투쟁의 방법을 알려주었다. 마침내 그는 1813년 8월 독립군 총사령관으로서 카라카스에서 입성했고,
사람들은 그를 '해방자'라는 칭호로 부르기 시작했다. 볼리바르는 이외에도 '군 총사령관', '최고원수', '공화국 대통령' 등 많은 칭호를 받았지만 그중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역시 '해방자'였다. 1815년 그는 스페인 왕실군에게 패하여 자메이카로 피신했다. 이곳에서 그는 <자메이카의 편지>라는 저서를 출판했는데 그 저서에는 해방자 볼리바르의 정치적 식견과 사상이 잘 드러나 있다.

볼리바르는 스페인의 지배하에 있던 여러 라틴 아메리카 식민지들의 현실을 날카롭게 직시하며 그것을 분석했다.
라틴 아메리카가 해방되지 못하는 이유로 식민지인들의 정치교육 부재, 크리오요들의 수동적 태도와 정치적 무관심을 지적하며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지향하고 있던 통합된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이상(理想)에도 불구하고 해방된 라틴 아메리카가 결국 여러나라로 조각날 것을 예견하기도 했다.

라틴 아메리카인의 탄생

볼리바르는 1817년 카우디요 파에스 장군의 군대와 5,000여 명에 이르는 영국과 아일랜드의 지원병을 합해 새롭게 독립투쟁을 시작했다. 1819년 혁명정부를 수립하고 <오리코코의 우편>을 출판했다. 이 책은 그의 정치적 선전과 계몽의 도구로 쓰였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들의 정체성, 라틴 아메리카인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스페인인이란 정체성을 벗고 라틴 아메리카인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그는 "우리는 인디오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럽인도 아니다. 우리는 원주민과 스페인 사람들 사이의 중간 인종이다."라고 했다.

1819년 5월 볼리바르는 안데스 산맥을 넘어 누에바 그라나다를 해방시켰다. 그리고 그해 12월 콜롬비아 공화국 성립을 선포하고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리고 볼리바르는 1822년 키토(현 에콰도르)를 해방시키고 이를 콜롬비아 공화국으로 통합시켰다. 누에바 그라나다를 헤방시킨 후 볼리바르는 페루를 해방시키기 위해 전쟁을 계속했고, 1822년 남미 해방의 두 영웅인 볼리바르와 산 마르틴(산 마르틴은 남부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을 해방시켰다.)은 에콰도르의 과야킬 항에서 만난다. 두 사람은 배석자없이 단독 회담을 했고, 회담 결과 산 마르틴은 페루 해방을 볼리바르에게 양보하고 돌아갔다.
회담 내용에 대해서는 두 사람 이외에는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어쨌든 두 사람은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을 위해 공적이나 권력을 놓고 다투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라틴 아메리카의 두 영웅은 아무런 유혈 사태없이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이란 대의에 충실히 복무했다. 그러나 산 마르틴과 시몬 볼리바르는 정치적으로 큰 견해차를 보였다. 산 마르틴이 사회혁명을 우려하여 왕실을 유지한 채 스페인과의 협상을 통한 독립을 원한 반면, 볼리바르는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고 새로운 공화국 수립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분열과 미국의 안 마당으로의 전락

볼리바르는 하나로 통일된 라틴 아메리카를 원했고, 그가 생존해 있는 동안에는 최소한 남미 북부 지역에서만큼은 '그란 콜롬비아'를 통해 그런 통일 상태가 유지되었다. 그가 중남미의 통합을 원했던 것은 미국이 하나의 연방으로 커가고 있는데 라틴 아메리카가 분열될 경우엔 결국 라틴 아메리카는 미국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볼리바르는 그런 그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1825년 아메리카 국가들간 최초의 모임인 <아메리카 회의>를 당시 콜롬비아의 영토였던 파나마 시에서 개최한다.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라는 거대한 대륙은 지리적 소통의 어려움과 각국가간의 서로 다른인종 혼혈, 지역간 대립 그리고 무엇보다 라틴 아메리카의 통합을 원치 않았던 미국과 영국의 분열정책으로 결국 20여 개 국가로 분열되고 만다. 그는 칠레만이 민주적인 방법의 통치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의 이런 예측은 살바도르 아옌데가 민주적인 방식으로 집권할 때까지도 이어졌지만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1828년 신생 독립국가들의 통합을 꿈꾸었던 시몬 볼리바르는 오히려 그를 죽이려는 음모에 맞닥뜨리게 된다.
1830년 4월 27일 공화국내 반란 세력들을 제어하는데 지치고 힘이 다한 볼리바르는 더 이상의 권력을 포기하고 여행길에 올랐다. 그는 좌절했다. 그는 27세의 젊은 나이에 독립 투쟁에 몸을 던진 이래 20년간 한편으로는 전쟁터를 떠돌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라틴 아메리카의 헌법을 기초했다. "우리들은 혁명을 위해서 몸바치는 동안 배울 시간이 없었다."
20년간 라틴 아메리카 해방을 위해 몸바쳤던 시몬 볼리바르가 좌절과 고통의 회한 속에 남긴 말이다. 우리들 역시 지금 그의 이런 말에 공감하고 있지는 않은지…. 같은 해 12월 17일 모든 희망을 상실한 시몬 볼리바르는 산타 마르타의 침상에서 자신의 묘비명을 구술하도록 했다. "아메리카는 이제 통치가 불가능하다.……마치 혁명에 몸을 내던진 사람이 바다를 경작하는 것처럼…."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가 <미로 속의 장군>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은 시몬 볼리바르이다.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현실에 체포된 볼리바르의 고뇌를….그의 이상이었던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과 독립 그리고 통합의 정신은 1889년 미국의 주도로 이루어진 워싱턴 회의에 의해 종말을 맞고 말았다. 그리고 21세기인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 라틴 아메리카는 미국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나로 통합된 라틴 아메리카의 이상은 그렇게 사라져 간 것이다.

*본 필자는 여태것 명망있는 사람보다는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됄만한 혁명가들만 다루었다 어쩌면 이들에 대해서 역설하기가 까다로왔다. 그렇기때문에 수많은 책들과 인터넷을 뒤져가면서 찾아야만 했다. 이번에 다루게됀 시몬 볼리바르의 이야기는 백과사전에 많이 의존했다. 이점을 양해해주었으면 한다.

 

이번에 이야기 할 인물은 이탈리아의 영웅이라고 칭송받는 '쥬세페 가리발디'라는 장군이다.
그 옛날 영화로도 제작됀적이 있는 그는 이탈리아에서 10명을 손꼽으라면 꼭 꼽히는 사람중에 한명이다.

가리발디는 니스에서 선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유년시절부터 아버지의 직업에 따라 배를 타고 고기를 잡아 내어 파는것으로 집안의 생필품을 대신했기때문에 집안의 형편도 그리 좋지 않았던것으로 알려졌다. 가리발디는 일생은 그가 군대에 입대하면서 부터가 시작이라고 한다.
그가 해군에 있을때 조국의 분열된 모습을 보고 통일운동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청년 이탈리아 당'이라는 정당에 가입하게된다. 청년 이탈리아 당 시절부터 로마 공화당까지 그는 여러차례 혁명운동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여 여러차례 외국으로 망명하는일이 있었다. 그가 청년이탈리아당의 혁명운동에 가담하다가 1834년에 관헌에 쫓겨 프랑스로 피신한후 리오그란데와 우루과이를 다니면서 치른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것은
너무나도 유명한 일화가 돼어버렸다. 1848년 이탈리아 해방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많은 지지를 받으며 이탈리아로 귀국 의용군을 조직하여 참가했지만 패배하게됀다.
이후 로마의 혁명공화정부에 참가하여 나폴레옹3세의 무력간섭에 대한 방어전을 지휘하게된다.
이듬해 공화정부가 붕괴되자 뉴욕으로 망명하였다가 1854년 팔레르모에서 새롭게 군대를 조직하여 로마 점령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카프레라 섬에 감금되었다.
이 무렵부터 공화주의로부터 사르데냐왕국에 의한 이탈리아통일주의로 전향 1859년의 해방전쟁에서는 알프스 의용대를 지휘하였고,1860년 5월에는 '붉은 셔츠'라는 군대를 조직 빠른속력으로 남이탈리아왕국을 점령 르디니아왕에 바침으로써 이탈리아통일에 기여하였다.
한때 카프레라섬으로 물러났으나, 로마 병합이 늦어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1862년과 1867년에 의용병의 로마탈취를 시도하였다가 실패, 카프레라섬에 연금되었다. 1870년 L.강베타의 모병에 호응하여 프랑스로
건너갔으며, 이듬해 보르도 국민의회에 선출되었으나, 프랑스인과의 관계도 좋지 않아 다시 카프레라섬으로 돌아와 사회사업 등을 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이탈리아의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번에 이야기할 인물은 프랑스의 장군이자 정치가인 샤를 드골대통령이다. 그는 프랑스의 영웅으로 칭송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생애
북프랑스의 릴에서 독실한 카톨릭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2년에 생시르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페탱 원수의 부하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부상하여 포로가 되었다가 1920년 귀국하였다.

그 해 폴란드군과 싸워 공을 세우고, 생시르 육군 대학 교관이 되어 군사 이론과 군 지도자론을 담당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기갑 사단장으로 있다가 국방차관으로 임명되었다.
44년의 파리 해방 뒤 임시 정부 부석, 45년에는 수상 겸 국방상을 거쳐, 47년에는 반공단체인 프랑스 국민 연합을 조직하였다.

51년 제1단으로 성장하였으나 53년에는 당을 해체하고 정계에서 은퇴함으로써 그의 시대는 끝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58년 알제리에서 쿠테타가 일어나고 제4공화국이 무너지려 하지 그는 다시 정계에 나타나, 같은 해 6월 수상이 되었다.
같은 해 10월을 기해 제5 공화국이 수립되고, 59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62년에 알제리 독립을 인정하는 에비앙 협정을 국민 투표에 부쳐 가결시킴으로써, 약 7년에 걸친 알제리 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였다.

그는 외교 정책에서는 프랑스의 위대함을 지키기 위하여 반미 정책을 쓰고, 64년 중공을 승인하였으며, 핵무기의 개발과, 유럽 경제 공동체의 추진과 영국의 가맹의 거부, 금본위 제도의 부활 주장, NATO 군사 기구로부터의 탈퇴(1966) , 미국의 월남 정책 반대 등, 미. 소 간의 틈바귀에서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전개하였다. 68년의 이른바 5월 혁명으로 말미암아 드골 집권 체제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하고, 69년에 실시한 국민 투표에서 패하여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저서에는 54∼59년에 걸쳐 쓴 제2차 세계대전 중의 『회상록』이 있으며, 정계에서 은퇴한 후에는 『자서전』을 집필하였다.

외교정책

드골의 역사인식의 특징은 대략 6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로 그는 역사를 통해 얻은 경험을 중요시했고, 둘째로, 프랑스대혁명은 끝났지만
사회적 불안정은 계속된다고 보고 국가의 안정성과 지속성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셋째, 국가 원수의 기능과 행동은 큰 폭을 가지고 상황을
초월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국민들의 국가에 대한 최고의 충성심을 강조하였다. 다섯째로 그는 조국 프랑스의 위대성을 추구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역사 전반에서 프랑스가 자연적 국경을 통일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고 판단한다.
그의 인격형성과 골리즘의 체계화에 핵심적 역할을 한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그의 외교정책과 국제관계에 대한 기본 이념 또는 비전을 살펴보면
첫째, 그는 유럽을 〔국가들의 유럽〕이라고 파악하고, 이 속에서 전통적인 국가들, 특히 프랑스가 존속해야 한다고 믿었다. 둘째, 정치에 대한 국가 개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셋째, 의회에 대한 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려고 했다. 넷째, 프랑스 역사의 지속성의 이념에 집착한 채 프랑스의 영구한 운명과 상황들을 돋보이게 하고 이를 통해서 정통성의 개념을 재발견하고자 노력했었다. 다섯째, 외교정책을 전개하는데 있어서 신중성을 잃지 않았다. 여섯째, 그에게 있어서 제3세계를 향해 취하였던 협력은 프랑스 외교정치에서 중요한 특성을 만들었고, 이것은 탈 식민지라는 역사인식에 부응하였던 신중한 정책의 다른 한 측면이다.

미국과의 관계

드골은 미국의 물질적 힘의 지배와 주요 유럽 국가들 사이의 힘의 상대적 결핍은 프랑스가 세계 서열에 들어서는 것을 어렵게 할 것이라
생각했기에 미국 산업사회의 물질적 가치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드골의 미국에 대한 비판·저항은 미국의 헤게모니 자체를 부정하기보다는 그것을 약화시켜 프랑스의 독립적 행동을 확보하고 그 위에서 독립적인 유럽을 구상하려고 한 것이었기에 근본적이기보다 전략적인 것이었다.
드골의 이러한 경향 때문에, 그를 믿을 수 없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취급했던 루스벨트는 북아프리카 공격에서 드골의 참여를 배제시켰고 이는
결정적으로 양자 사이의 긴장을 초래하였다. 루스벨트의 평화전략은 미국 자신이 평화의 구조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며 동시에 일단 패배한
국가들은 미국의 전략적 구조에 복종해야 하며, 그래서 프랑스가 미국을 구원자 및 중재자로서 인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항하여
드골은 영·미의 전략적 계획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영·미 군대가 프랑스의 저항운동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하여 남부 프랑스
공격에서 프랑스 군대를 사용하지 못할 것을 매우 두려워했기에 드골에 대하여 유화적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드골은 전쟁을 수행하면서도 프랑스의 영광과 위대성에 집착하였고, 특히 자유프랑스의 위치를 손상시키지 않으려 했던 골리즘을 전시외교에서도 견지하였다.
1958년과 1959년 사이의 8개월은 전후 유럽을 재건하고 프랑스의 독립외교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프랑스와 미국간의 관계를 재정립하는데 매우중요한 시기로, 드골의 기본입장은 프랑스가 '미·영·프'로 구성되는 삼두지도체제에 가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프랑스가 세계문제에 대한 공동정책을 수립하는 데 참여해야 하고, 핵무기를 배치하는데도 참여해야 한다는 입장인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드골의 독자적인 핵개발정책을 포기시키려 하면서도 소련에 맞서 프랑스 영토에 중거리탄도미사일을 배치해야 했기에 드골에 정면 반대할 수 없었다. 한편 드골은 프랑스 영토에 배치한 핵무기의 통제와 사용에 대한 결정권을 프랑스가 보유하는 경우에만 배치가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케네디 역시 나토를 위시한 동맹문제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특권 있는 목소리를 가져야 한다는 드골의 열망을 반대하며 드골의 독립외교정책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한편 드골은 케네디가 중대하게 다루었던 냉전 자체를 무시하고 있었는데 이는 냉전이 자신의 독립외교와 기동할 수 있는 능력 자체를 약화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골은 소련이 언젠가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포기하고 서구세계 특히 프랑스와 연합하여 서구의 일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 드골은 초국가적 기구에 프랑스를 몰입시키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지만 공동시장을 프랑스 경제를 현대화시키는 동시에 서유럽을 프랑스 체제하로 동원할 수 있는 지렛대로 받아들였던 반면 케네디는 하나의 통합된 초국가적 서유럽을 건설하고, 공동시장을 서독을 정착시키는 수단으로 보았다. 즉 소련의 서구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저지시키는데 서독을 이용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하였던 것이다.
결국 드골은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미국을 지원하였지만 케네디의 대유럽 군사·외교적 도전을 좌절시키고, 유럽공동체 건설에 있어서 독립적 위치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드골리즘

철저한 역사 인식에서부터 출발한 골리즘은 드골의 평생을 관통하면서 형성되고 내외적 시련을 겪으면서 견고해졌다.
이 골리즘은 그의 특유의 민족주의 이념을 잉태시키는 데 절대적으로 작용하였으며, 이 양자가 변증법적으로 발전하여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일련의 프랑스의 이념들로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다. 일찍이 “프랑스는 국가에 의해서만 존재하였다.”라고 한 그는 조국에 뜨거운 봉사와 애정으로 뭉쳐진 골리스트적 민족주의자로 성장하였다. 그의 특유한 행동양식과 신념이라고 할 수 있는 골리즘과 민족주의 이념은 파시스트 독일과 비시정권에 대항하여 투쟁하고 조국을 해방시키는 과정에서 성숙해졌고, 정권을 재창출하고 하야할 때가지의 통치기간에 골리즘은 내면화되면서 일련의 프랑스 이념들을 잉태시켰다.
이러한 골리즘은 국내정책에는 물론이지만 외교정책 - 유럽재건주의 - 에 더욱 적극적으로 반영되었다. 그가 제시했던 댜양한 재건 모델은 이상적 접근이면서도 현실적 접근을 상당히 포괄하였다.「함께 뭉친 유럽」「단결된 유럽」「조국으로 구성된 유럽」을 제시하는 한편, 유럽적인 연방을 제시한 것은 바로 현실적이면서도 이상적 비전을 고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접근 속에서도 지속적인 방향은 민족국가의 속성을 약화시켜 무국적인 국가로 만들어 갈 ‘초국가적조직’을 건설하는데 일관성 있게 반대하였다는 것이다.
식민지 문제에 대한 드골의 접근은 깊은 사색과 고민의 그리고 국내외적 협박의 연속선상에서 「탈식민지화」로 연결되었고, 여기서도 이상주의적 정책과 현실주의적 정책이 교차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순수하게 골리즘을 추구하려는 이상주의적 정책은 전후 국제환경의 변화와 구식민지의 자각으로 인하여 그 한계에 부딪혔다. 그러나 변화와 적응을 동시에 추구하는 현실주의적 정책 -비동맹외교정책- 은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구식민지들을 계속 프랑스제국의 속박에서서 풀어줌으로써 프랑스가 국제문제에 참여하고 개입의 폭을 확대함으로써 새로운 국가이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현실적 발상으로 전환하였다. 이는프랑스가 구식민지들과 특별한 유대관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더 많은 세계문제에 개입한다면 그 영광과 위대성을 찾을 수 있다는 현실적 접근을 의미한다. 결국 프랑는 북아프리카와 인도차이나 반도를 잃어버렸지만 오히려 식민지들을 유지하는 데서 오는 국제적 비난을 스스로 회피할 수 있었고, 따라서 국제도덕을 가지고 유엔에서 5대 상임이사국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능동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출처 : 소나기(jkh)
글쓴이 : 소나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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