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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2장 통제기구와 임무 (1)

雲光 2009. 4. 13. 18:44

                                                                               통제기구 (사령부)

 

미 제8군사령부는 서해안 지역에 반공무장대를 적지 내륙으로 침투시켜 유격전을 전게할 계획아래 51년 1월 중순에 서해안 유격군사령부 월리암 에이블스 기지를 창설하였다 유격대에 대한 통제는 처음에 미8군에서 담당했다가 미 극동사령부로 이관되었다 51년 1월 15일 미 제8군사령부는 유격대를 지원할 통제기구로 작전참모부(G-3)에 지구전과를 설치하였다 그 해 5월 지구전과는 해체되고 제8086부대인 기타업무단 으로 재편되었다 기타업무단의 목적은 한반도에서 게릴라전을 발전시키기 위한 전담기구를 구축하는 데 있었다 기타업무단은 미 제8군 후방지휘소 의 통재하에 부산에 있는 미 제8군 후방지휘소의 보급지원을 받았다 적 전선 후방의 유격대 운용에 대한 통제가 극동사령부로 이관 되면서 51년 7월 26일 미 극동사령부 연락처(FEC/LD) 제8240부대를 창설했다 주한연락처 (FECLD/K)는 극동군사령부 연락처의 통제를 받았는데 본부는 서울시 인사동 남조선전기주식회사 빌딩에 있었다 이미 1949년 6월부터 미 극동군사령부는 정보참모부 산하에서 주한연락처 (KLO)를 설치하여 첩보활동을 해왔다 주한 연락처는 유격전과 와 첩보전과를 편성하여 유격전과 첩보전을 망라하엿다 52년 9월 말 사령관은 알랙산더 대령 부사령관은 아이베스 대령 유격전과 책임자는 밴더플 중령이였고 첩보과는 두페 중령이 담당하였다 당시 유격전과는 유격사령부로 불려져서 밴더플 중령이 주한 연락처 유격 사단장 이었고 두페 중령은 정보국장이었다 51년 12월 28일 미 극동군사령부는 연합정찰사령부 를 설치하였다 사령부 아래는 극동사령부 주한연락처 주한 합동고문단 미 공군 정보대 미 육군 제8007부대 등이 있었다 이 사령부는 당시

 

난립해 있는 여러부대들 사이에 역활 조종을 하기 위해 창설되었으나 지휘권이 없어 단순한 조정기관에 그쳤다 따라서 예하 기관들에 대한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아니라 협조가 부족하였다 예하부대는 사실상 독자적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작전의 중복이나 노출 등에 혼선이 있었다 이러한 요소 때문에 CIA의 한 간부는 단일 조직으로 작전활동을 수행했더라면 효율적이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51년 12월10일 극동군 사령부 주한연락처와 기타 업무단이 통합되어 유격대의 작전통제권이 극동군 사령부의 정보참모부 (G-2)로 이관되었다 52년 9월 하순 유격대 증강이 계획되면서 주한 연합정찰사령부는 제8242부대로 개칭되고 극동사령부 연락단으로부터 예속이 해제되면서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처의 작전통제권을 인수하였으나 여전이 극동사령부 주한연락처 제8240부대로 널리 불렸다 52년 11월 연락파견대의 유격부대를 주한 유엔군 유격부대로 명령하였다 53년 6월 현제 연합정찰사령부 제8240부대의 간부진은 사령관 스튜어트 준장 부사령관 길보 공군대령 참모장 스타인벡 대령 부관 에반스중령 군수참모 파운틴 소령등 이었다 이상과 같은 편성으로 전쟁 중 계속 운영하다가 휴전무렵부터 유엔군 유격부대 개편안에 논의 되면서 53년 8월 국방부 제8250부대로 재편되었다 이 후 53년 9월에는 극동군사령부 주한 연락처(제8240)부대 예하 유격과가 독립단위 부대로서 주한 유엔군 유격부대로개편되어 유격대를 전적으로 통제 및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주한연합정찰사령부는 해체되는 동시에 극동육군 협조파견대 (제8087)부대가 신편되어 한국에서 극동군 연합정찰사령부의 역활을 대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복잡한 통

 

제 기구 아래 맥키 대령 벤더플 중령 무겔버그 중령 등이 유격부대를 실질적으로 지휘했다 이 가운대 유격전 경험이 품부했던벤더플 중령이 담당했던 시기가 부대운용에서 보다 효과적이였다고 평가를 받았다 그는 포병 출신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필리핀 바탈 방어작전에 참가하여 현지인들과 합께 유격전을 전게한 경험이 있었다 무겔 버그 중령은 동양에서 4년간 복무한 경험이 있었으나 유격작전에 대해 특별한 경험은 없었다 한편 유격부대와 한국군과의 관계에 대해 신태영 국방부장관은 한 격려사에서 제8240부대원들을 자신의 지휘하에 있는 부대일뿐 아니라 유엔군의 특수한 임무를 띤것으로 인식했다 이러한 태도는 51년 4월 육군 총참모장 정일권중장이 구월산유격대 대한 표창장을 수여할 때에도 들어났다 당시 미군 예하에서 동키 제2부대의 부대장으로 활략하고 있던 김종벽 대위의 소속을 육군정보국 구월부대 (황해도지구 유격대)로 표기하였다 대원들도 스스로 육군정보국 소속으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군통제 아래 있었던 을지 제2병단이 미군 지휘로 편입되기 전에는 한국 해군의 지원을 받았으나 미군 통제 이후로는 국군에서 이들을 외인부대 처럼 소홀이 했다 51년 1월 중순 미 제8군 맥기 대령이 미군은 물론 한국 육군.해군 등으로 연합사령부의 설치를 제안했다 초기 작전계획에 의하면 각 기지에 한국군 해군 경비병 100명 외에 한국군으로 해군 지휘관.유격기지.지휘관.참모장교 및 사병 등을 편성할 예정이었으나 이대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다만 국군과 유엔군과 합동작전의 긴밀한 상호 연락을 위해 육군본부에 국제 연합연락장교단이 창설된 것처럼 미 극동 주한연락처 파견단 본부에는 한국군 육군 파견

 

장교단이 있었다 장교단은 계인주 대령이 첩보업무를 맞았고 51년 9월초 유격사단 부사단장으로 이영순 대령이 임명되었다 그는 미 군정시기 군사영어학교 출신으로 미 극동군사령부의 요청에 의해 발탁되었다 그 외 오봉규 소령.이창복 소령.선우진 소령.홍승명 대위.고흥순 대위 등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카투샤와 같은 병력은 파견되지 않았다 그들은 유격대원의 인사 작전권을 비롯하여 보고 계통에서 소외되어 거의 통역장교 수준이었다고 한다 오봉규 소령은정훈장교 출신으로유격대원의 규율을 단속하는 역활을 하였다 그는 대원들이 부대 내나 사회에 말썽을 일으켰을 경우 이를 처리하는 외에 부대운용에 아무런 발언권이 없었다고 회고 하였다 이러한 여건이였으므로 국군 장교단은 각 기지사령부와 한국인 부대장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지 못했다 백령도 기지사령부에서는 동키 제2부대장 김종벽 대위와 갈등이 있었고 울팩 기지사령부에서는 타이거여단 사령관 이현서가 한국군과 연게를 가지려 했으나 이러한 문제들이 국군장교단을 통해 해결되지 못하였다 53년 5월 20일 연합정찰사령부의 요청으로 이 대령과 그의 참모들은 원대복귀하고 김안일 중령과 김일환 중령이 파견되었다 이들의 임무는 유격대의 명단 대북 심리전 강화 불합리한 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한 선별적 점검계획 수립 등이었다 이미 51년 2월 16일 국방부에서는 육군본부 작전국과 군수국에 속한 전사편찬위원회와 후방전사편찬위원회를 학대하여 전사감 을 설치하여 전사기록에 필요한 자료수집과 편찬 기능을 강화하였으나 비 제8240부대에 대해서는 전혀 통제 하지않았다 심지어 휴전 후 국방부 제8250부대가 창설되어 유격부대의 인사.행정.포상 및 징계권을 인계했으나 유격부대의 작전통제권만은 주한 극동군사령부 연락처가 계속 장악하였고 유격대의 포상권은 1954년 12월31일 까지 포상을

 종결지어 지금도 많은 유공자들이 국가의 혜택을 전혀 받지못하는 모순을 나았다 훈장을 받는이는 수개 수십개의 훈장을 받았지만 양심가들은 훈장을 거부 또는 국방부에 말살등으로 하나도 받지못한 장교도 많이 있었다 그 예로 구월산부대 김종벽 대장이 그러했다 그는 백령도 기지사령관 버크 소령과의 갈등으로 수 많은 전공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의 훈장이 없었다 51년 2월 중순경 미 제8군은 작전참모부 예하 지구전과 책임아래 첩보수집 침투계획 대원 모집.훈련.지원 등을 할 작전수준급 부대인 작전기지사령부로 백령도 월리엄 에이블 기지와 부산근교에 공수훈련 및 특수임무를 담담하는 베이커기지 를 창설하였다 51년 3월 월리암 에이블기지가 레오파드 기지로 이름이 바뀌면서 산하애 유격부대는 건제순으로 동키부대에 숫자를 부여했다 레오파드기지의 작전지역은 북쪽으로 평안북도 연안 도서인 신미도와 대화도로부터 남으로는 옹진군 흥미반도의 장산곶까지였다 그 후 서해안에서 울팩부대가 창설되었다 51년 4월 15일 미 제8군 작전참모부 지구전과에서는 서해 지역에서 전게하고 있는 유격전과 균형을 유지시키기 위해 동해안 지역에도 유격부대를 편성할 필요성을 느끼고 한구군 지휘 하에 있던 동해안 유격부대인 육군 을지 제1병단의 작전통제권을 인수하여 주문진에서 (커크랜드)부대를 창설하였다 베이커기지는 후에 제1공수연대로 커크렌드 부대는 스캐론부대로 개칭되었다 베이커기지와 커크랜드기지는 제 5장에서 개별기지를 다룰때 자세히 서술할 것이다 51년 중반 이후 서해안 지역에서 유격대가 계속 증가하자 유격작전 지역을 2개의 독립지역 사령부로 분할하였다 즉 옹진반도 장산곳을 기점으로 레오파드 기지사령부는 옹진반도의 서쪽 및 서북부지역을 울팩 기지사령부는 옹진반도의 동쪽과 남쪽으로 한강 어귀와 인천 앞 바다의 도서를 관할

 

하였다 이 때문에 울팩기지사령부를 남사령부 동키사령부를 북사령부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백령도 레오파드기지사령부는 예하 20개의 유격대를 두었다 산하의 부대는 명칭이 당나귀부대였기 때문에 당나귀기지라고도 하였다 동키부대라고 칭한 이유는 백령도 레오파드기지사령부와 제일 먼저 연결된 신천무장대가 부대명 을 지을때 사자부대.봉화부대 등이 논의되었으나 대원 중 한사람이 무전기에 필요한 발전기(제너레이터)가 당나귀 형체와 똑같다고 해서 당나귀부대라는 명칭을 제안하였는데 이를 수락하여 동키부대가 되었다 그는 발전기를 보면서 전쟁전 고향의 제유공장에 있는 당나귀 한마리에 대한 간절한 추억을 연상케 했다고 한다 51년 2월 백령도 기지의 지휘관은 버크 소령으로 시작하여 에곳트 중령 맥킨 중령 다시 소령 등이 뒤를 이었다초기에는 사령관 외에 작전과 통신을 지원하는 장교가 있었을 뿐이넜으나 점차 정보.훈련.특수임무 등을 담당하는 위관급 장교와 행정.보급.통신.취사 등을 담당하는 사병 25명이 파견되었다 이들이 산하의 유격대를 통제하고 지원을 하였다 앵글 나인 무전기로 산하 부대와 교신 하였다 51년 12월 백령도 레오파드기지의 작전지역이 넓어서 부대사령부에는 그 임무를 분담시키기 위하여 강화도에 울팩기지를 설치하였다 울팩기지의 모체는 교동도에 지구사령부를 두고 강화도로 부터 연평도 서쪽까지 담당했던 페릴 특수임무 부대였다 울팩작전기지는 산하에 10여 개의 부대가 있었다 타이거여단 제3연대를 울팩 제9부대로 편성했다는 기록이나 울팩 제10부대와 울팩 제22부대의 작전활동이 일부 나오지만 주요부대는 8개의 부대이다 강화도에 있는 기지사령부는 8개의 울팩부대의 본부를 조종

 

하는 임무를 맞았다 산하 각 유격부대들은 레오파드기지사령부 예하에 있을때 호칭한 동키부대를 사용하지 않고 울팩부대의 건제순으로 부여된 숫자로 불렀다 .........계속 ..

 

출처 : 구월산유격대
글쓴이 : 유격전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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